마지막 기회

2017.07.31 13:14 입력 2017.07.31 23:00 수정
사회부 이범준 기자

돌이켜 보면 이번 ‘판사 블랙리스트’ 의혹에서 보여준 양승태 대법원장의 행동은 상식적으로 이해하기 힘든 것이다. 지난 2월에는 블랙리스트 관리를 지시받자 이를 거부한 이모 판사의 법원행정처 발령을 되돌리는 초유의 인사안에 결재했다. 3월에는 인사안 결재 등 사법개혁 저지 사실이 보도되자 부하인 법원행정처장이 거짓말을 공지했다가 들통이 났다. 4월에는 자신이 전권을 부여했다는 조사위원회가 판사들의 ‘판사 블랙리스트’ 증언을 듣고도 무시했고, 이런 사실이 보도되고서야 조사를 시도했지만 대법원이 거부했다.

[기자칼럼]마지막 기회

지난 5월에는 공과대학 출신 판사 등이 블랙리스트 문제를 적법한 사법부 내부 조사가 가능하다며 직을 걸고 공언했지만 못 들은 체했다. 6월에는 전국법관대표회의의 추가조사 의결을 동문서답으로 무시했다. 도리어 “동료 법관들 간의 상호 신뢰와 존경이야말로 우리가 법관으로 근무하면서 얻을 수 있는 행복감의 가장 큰 원천”이라는 난데없는 얘기도 했다. 도무지 이해되지 않는 그의 행동을 모두 기록하기는 힘들다. 결국 그를 향한 퇴진 요구와 차가운 비난이 전국의 판사들, 200개 가까운 시민단체, 정치권에서 나왔다.

양승태, 산전수전 다 겪은 노회(老獪)한 그가 쏟아지는 비난을 받아내는 이유가 있을 터였다. 지난주 김기춘 전 대통령비서실장 등에 대한 문화계 블랙리스트 사건 판결 선고에 실마리가 있었다. 법률상 블랙리스트 범죄란 ‘부당한 지시 그 자체’였다. 예술인들이 지원 대상에서 배제됐는지까지는 법원이 따지지도 않았다. 명단을 만들어 여러 대상에서 배제하도록 지시한 행위 자체가 범죄라고 했다. “문체부 공무원을 통하여 영화기금지원사업 등에서 특정 영화관·영화제를 배제하거나 지원금액을 감액하도록 개입하게 한 행위는 직권의 남용”이라고 판단했다.

이 판결이 나오고 지난 6월 대법원 공직자윤리위원회의 대법원 사법개혁 저지 사건에 대한 의견을 다시 봤다. “이규진 부장판사는 임종헌 전 차장으로부터 사실상 지시를 받아 국제인권법연구회 또는 공동학술대회를 견제하기 위하여 전문분야연구회 중복가입 해소 조치를 시행하였다. 그리고 이규진 부장판사는 이○○ 판사에게 국제인권법연구회와 관련한 부당한 지시와 간섭을 하였다.” 대법원은 유력한 범죄 혐의를 받고 있었다. 적잖은 판사들은 “대법원 공윤위 의견이 판사 블랙리스트는 다루지도 않았지만, 이번 블랙리스트 판결로 대법원의 범죄가 확실히 인정되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블랙리스트 혹은 직권남용의 최정점인 박근혜 전 대통령과 양승태 대법원장의 책임은 앞으로 가려질 것이다. 블랙리스트 사건을 담당한 서울중앙지법이 박 전 대통령은 공범이 아니라고 했지만 오지랖 넓은 참견이다. 대법관을 지낸 법조계 인사는 “다른 재판부의 주요 피고인에 대해 왜 그런 판단을 하는지 이해가 안된다”고 했다. 법조계 관계자들은 “이미 범죄 혐의가 드러난 대법원으로서는 판사 블랙리스트만은 막으려 할 것이다. 범죄자의 범위가 법원행정처 대부분으로 확산되면서 그만큼 대법원장의 형사책임이 무거워지기 때문”이라고 했다.

이렇게 대법원의 범죄 혐의가 드러났는데도 판사들은 검찰 수사를 한사코 반대한다. 검찰을 신뢰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양승태 한 사람 때문에 법원이 쑥대밭이 된다는 것이다. 판사들의 이런 심정을 양승태 대법원장은 간파하고 이용해온 것이었다. 내부 조사만 막으면 검찰 수사는 없으리라고 믿는 것이다. 하지만 판사들의 말과 달리 대한민국 어느 누구도 검찰을 신뢰해서 수사를 받는 것이 아니다. 검사 출신 피의자도 검찰을 믿지 않는다. 그러고 보면 사법부 내부의 추가조사를 요구하는 전국법관대표회의 의결은 꽤나 집단이기적인 것이다. 이제 양승태 대법원장은 사법부를 위해 무엇보다 자신의 차후를 위해 추가조사를 들어줘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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