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이, 류성룡 그리고 이산해

2017.11.01 11:15 입력 2017.11.01 22:04 수정

[역사와 현실]이이, 류성룡 그리고 이산해

조선시대에 인물 많기로 유명한 시기가 선조 때(1567~1608)이다. 이미 조선시대에 이 시기를 가리켜 ‘목릉성세(穆陵盛世)’라 했다. 목릉은 선조와 그의 부인들 무덤 이름이다.

이 시기에 임진왜란을 겪었으니 평화롭고 융성했다는 뜻으로 보기는 어렵고, 뛰어난 인물이 많았던 것을 뜻할 것이다. 많은 기라성 같은 인물들 중에서도 발군이었던 이들이 이이, 류성룡, 이산해이다.

이이(1536~1584)는 문과를 포함해 모두 9차례 시험에서 장원을 했다. 치른 시험마다 거의 수석을 했던 것이다. 29세인 1564년에 문과에 합격하여 지금으로 치면 기획재정부 중간 책임자급인 호조 좌랑으로 벼슬을 시작했다.

오늘날 그의 이름을 모르는 사람도 많지만 이산해(1539~1609)는 당시 여러 면에서 이이 못지않았던 인물이다. 이이보다 세 살 적지만 문과는 오히려 3년이 빨랐다. 1561년 23살 나이로 승문원에서 관직을 시작했다. 승문원은 외교문서를 다루던 곳인데 어리고 글 잘 짓는 문과 급제자들이 주로 발령되었다. 류성룡(1542~1607)은 이산해보다 세 살 적었다. 25세 되던 1566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그 역시 승문원에서 관료생활을 시작했다. 선조가 1567년부터 재위했으니 그는 처음부터 세 사람과 함께했다. 선조가 16살, 류성룡이 26살, 이산해가 29살, 이이가 32살이었다.

어떤 개인의 사회적 가치에 대한 태도는 입체적이어서 어느 한 면으로만 규정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빼놓기 어려운 측면 중 하나가 권력에 대한 태도일 것이다. 흥미롭게도 그 면에서 세 사람은 판이했다. 이이는 요즘 식으로 표현하면 많이 리버럴했다. 선조에게 말할 때 거침이 없어서, 선조 얼굴에 자주 언짢아하는 기색이 돌았다. 그러다 선조가 그의 말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그는 훌쩍 조정을 떠났다. 이이를 다시 부르라고 사람들이 말하면 선조는 그가 “성질이 굳세고 과격”하며, “나를 섬기려 하지 않는데” 어쩌겠느냐고 비꼬듯 하소연하듯 말했다. 선조는 이이에게 애증을 가지고 있었다.

세 사람 중에서 따뜻한 마음으로 선조가 제일 좋아했던 사람은 류성룡이다. 그는 남인이었지만, 각각 북인과 서인 주도로 만든 <선조실록>과 <선조수정실록>에서 그에 대한 평가는 비슷하다. 자질이 총명하고 판단력과 문장력이 빼어나서 일찍부터 명성이 높았다고 기록되었다.

그의 단점에 대한 지적도 유사하다. 임금의 신임을 얻었는데도 바른말을 하지 못해서 대신답지 못했다고 말한다. 착하고 탁월했지만 직언하는 타입은 아니었던 것이다. 정 못 견디겠으면 그는 고향 안동으로 돌아갔다.

하지만 그의 마지막은 사뭇 달랐다. 임진왜란을 마무리 짓고 고향에 돌아온 후 죽을 때까지 10년 세월 동안 다시는 한양에 걸음을 하지 않았다. 선조가 억지로 내린 공신 지위도 거부했다. 전쟁 중 무책임으로 일관한 선조에 대한 무언의 항의였다.

이산해는 어릴 때부터 신동으로 유명했다. 11살에 과거시험 첫 단계인 향시(鄕試)에서 장원을 했다. 시험관이 아직 어린 그가 진짜 답안을 작성했는지 의심하여 다른 주제로 다시 한번 글을 짓게 했다. 그 자리에서 같은 수준의 답안을 바로 내자 감탄을 금하지 못했다고 한다. 그는 시대를 대표하는 문장가 중 하나였고 그의 글씨는 더 유명했다.

이산해는 선조 즉위와 함께 정치의 전면에 등장한 젊은 사림 중에서도 내내 최선두에 있었다. 결국 그들 중에서 가장 먼저 정승이 되었고, 영의정을 무려 세 번이나 지냈다.

문제는 그가 선조에게 바친 충성의 성격이다. 그는 아예 자기주장이 없는 듯 선조에게 충성했다. 그의 충성은 국왕으로 상징되는 어떤 대의나 원칙에 대한 것이 아닌, 선조 개인에 대한 추종에 가까웠다. 이이와는 물론 류성룡과도 달랐던 것이다.

세 사람에 대한 평가는 이미 조선시대에 내려졌다. 이이는 문묘에 배향되었다. 조선 사대부로서는 최고의 명예이다. 당색과 관계없이 류성룡에 대한 평가도 후하다. 하지만 이산해는 혹독한 평가를 받았다. 마치 합의나 한 듯이 그 많은 조선의 서원들 중에서 그를 배향한 곳이 단 한 곳도 없었다. 살았을 적 빛나던 영광에 대비하면 너무나 극적이다.

요즘 ‘적폐청산’과 관련해서 전·현직 공직자나 언론인 등 많은 인물들이 언론에 오르내린다. 그들 중 상당수는 어린 시절부터 무리 중에서 우수했던 사람들이리라. 이산해가 그랬듯이. 이산해는 고위관료가 되면서 점차 부정적 평판이 높아졌다. 이것이 당쟁이 격화되었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가 올라간 자리는 더 이상 개인의 우수함으로 충분한 영역이 아니었다. 그는 당대 사대부의 상식적 가치를 넘어섰다. 그랬기에 조선은 그를 기리지 않았고, 그는 결국 망각되거나 부정적으로 기억되었다.

개인의 우수함이 당대의 상식이나 가치를 대신할 수는 없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그것은 심각한 일이다. 그것은 공동체가 없는 것을 뜻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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