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산 김창숙 선생을 그리며

2017.11.15 10:56 입력 2017.11.15 20:44 수정

[역사와 현실]심산 김창숙 선생을 그리며

김창숙(金昌淑·1879~1962) 선생은 그분의 호를 따라 “심산(心山) 선생”이라 불린다. 사람의 일생을 한마디로 말하기는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지만, 이 분의 경우에는 두 번 생각할 필요조차 없다. 선생은 참된 선비셨다!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선생은 이완용을 비롯한 ‘을사오적’을 성토하였다. 그로 인해 선생은 옥고를 치러야 했다. 그럼에도 선생의 뜻은 변하지 않았다. 1909년에는 친일단체 일진회가 ‘한일합병론’을 꺼내자 반박문을 써서 정부에 보냈다.

나라를 잃고 어언 십년이 지난 1919년 3월, 독립만세 운동이 크게 일어났다. 이에 선생은 분연히 일어나 ‘유림단진정서(儒林團陳情書)’를 가지고 중국의 상하이로 갔다. 파리에서 열리는 ‘만국평화회의’에 이 서한을 보낼 생각이었다.

이후로도 선생은 국내와 중국을 여러 번 왕복하며 조국의 독립을 위해 혼신의 힘을 다했다. 자연히 선생의 신변은 늘 위태하였다. 1927년 5월, 선생은 상하이의 공동조계(共同租界)에 있던 어느 병원에 입원하였다. 선생을 노리고 있던 밀정에게 꼼짝없이 체포되고 말았다. 국내로 강제 송환된 선생은 징역 14년형을 선고받고 대전형무소에 갇혔다. 그러나 옥중에서도 투쟁은 계속되었다. 저들은 모진 고문으로 선생의 의지를 꺾으려 했고, 그리하여 선생을 ‘앉은뱅이’로 만들어버렸다.

1945년, 여운형은 지하 비밀결사 ‘건국동맹’을 조직하고 선생을 ‘남한’ 책임자로 모셨다. 그러나 이 일이 탄로되어, 선생은 왜관경찰서에 구속되었다. 선생은 거기서 광복을 맞이하였다.

해방 후 선생은 한반도에서 지배권을 행사한 미국과 소련 모두를 마땅치 않게 여겼다. 선생의 생각에는 자주독립의 먼 길을 헤쳐 나가기 위해서는 유학의 근대화가 급선무였다. 그리하여 성균관을 재정비하고, 1946년 9월 성균관대학을 설립해 초대 학장이 되었다.

또 선생은 ‘유도회(儒道會)’를 조직해 과거 친일행각에 골몰한 악질 유림을 소탕하는 일에 앞장섰다. ‘적폐’ 청산운동의 일환이었다.

선생의 충정과 절개는 끝내 변하지 않았다. 1951년 이승만의 독재에 저항하여 그의 “하야(下野)”를 촉구한 경고문을 보냈다. 이 일로 선생은 부산형무소에 40일간 수감되기도 하였다. 1952년 5월, 피란지 부산에서 이승만은 정치파동을 일으켜 자신의 독재 권력을 강화하기에 혈안이 되어 있었다.

이에 선생은 이시영 등과 함께 ‘반독재호헌구국선언(反獨裁護憲救國宣言)’을 발표해 권력욕에 눈먼 독재자를 꾸짖었다.

그러자 독재자의 주구들이 감히 선생에게 테러를 가하기도 하였다. 1956년에는 이승만 정권에 기생하던 친일유림의 강압으로 성균관대학교에서 물러나게 되었고, 그 이듬해에는 성균관장, 유도회총본부장 등 일체의 공직에서 쫓겨나는 수모를 당했다.

그러나 양심적인 인사라면 누구나 선생을 존경하였다. 5·16 군사 정변을 일으킨 박정희는 병중의 선생을 찾았으나 방문을 닫고 만나주지 않았다. 1962년 5월10일 선생은 한 많은 생애를 마감하였다. 한국 사회는 ‘사회장(社會葬)’으로 선생의 고결한 삶을 기렸다.

부끄러운 말이지만, 나의 집안도 선생과 무연(無緣)하다고는 할 수 없다. 1947년 겨울, 선생이 성균관장으로 재임할 때였다. 그때 선생은 전국의 ‘친일 유림’을 소탕하고자 하였다. 그리하여 뜻 있는 분들을 골라서 전국 각 지방에 퍼져 있는 향교의 중책을 맡기었다. 나의 조부도 전주향교의 ‘장의(掌議)’에 임명되었다. ‘백 아무개를 전주향교 장의에 임명한다’는 내용이 적힌 흰색의 문서봉투가 70년 전의 역사를 오늘에 전하고 있다.

그 당시 심산 선생을 비롯한 전국의 유생들은, 새로운 마음으로 이 나라를 폐허에서 일으키고자 하였던 것이다. 친일 잔재를 말끔히 청산하고, 하늘의 도를 따라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세상을 만들고자 하였다.

하지만 그들의 꿈은 교활한 정상배와 잔악한 매국노들에게 유린되고 말았다. 이명세와 같은 친일 무리들이 독재자에게 아부하며 판을 쳤다.

우리 사회는 심산 선생이 작고하고 50여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각 방면에 쌓인 ‘적폐’를 청산하지 못하고 있다. 여간 부끄러운 일이 아니다.

언제나 당당하고 떳떳했던 심산 선생, 그분은 유자(儒者)였으나 권력자의 사익추구를 가장 경계하였다. 선생이 즐겨 애독한 유교경전에는 “백성이 나라의 근본”이라 적혀 있었고, 선생은 이를 현대적으로 풀이하였다.

가장 중요한 것은 시민이요, 그다음은 나라요, 가장 가벼운 것은 권력자이다. 선생은 이를 확신하였기에 일제의 압제에 굴하지 않았고, 독재자의 강포한 폭력 앞에서도 위축되지 않았다. 일제에 아부한 썩은 선비들을 멀리하고, 뜻있는 유림을 모아서 나라를 재건하고자 한 것도 다 그런 깊은 뜻에서 비롯된 일이었다. 갓 쓴 선비라 해서 반드시 고루한 것도 아니요, 입만 열면 ‘안보’와 ‘경제성장’을 주문처럼 되뇐다고 해서 믿음직한 정치가가 되란 법도 없다. 모쪼록 선생처럼 신실하여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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