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6년 김인희, 2017년 김인희

2017.12.21 20:40 입력 2017.12.21 20:49 수정

드라마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이별>의 한 장면. ‘할머니’역을 맡은 배우 김영옥씨(왼쪽)와 ‘인희’역의 배우 원미경씨가 함께 앉아 있다.

드라마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이별>의 한 장면. ‘할머니’역을 맡은 배우 김영옥씨(왼쪽)와 ‘인희’역의 배우 원미경씨가 함께 앉아 있다.

얼마 전 tvN에서 노희경 작가의 전설적인 초기작을 21년 만에 리메이크했다. 1996년 겨울, MBC 창사 35주년 특집극으로 방영된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이별>은 가족을 위해 평생 헌신해 온 중년의 기혼 여성이 말기 암 진단을 받고 가족과 이별을 준비하는 내용을 그린 드라마다. 4부작의 짧은 길이에도 불구하고 다음해 백상예술대상 TV부문 대상과 작품상을 석권할 정도로 높은 완성도를 인정받았다. 당시 신인이던 노희경은 이 드라마를 통해 차세대 거장으로 주목받았고, 주연을 맡은 나문희도 명배우로서 진가를 입증했다.

보통 원작이 뛰어날수록 리메이크에 부담이 따르게 마련이지만, 2017년판 드라마는 원작자 노희경이 다시 한 번 극본을 맡음으로써 오히려 기대감을 드높였다. 방영 중에도 준수한 시청률을 기록하며 완성도에 호평이 잇따랐다. 성공의 핵심 원인으로 먼저 손꼽히는 것은 시대를 초월한 이야기의 힘이다. 애초에 드라마 원작자가 직접 리메이크하는 일도 드문데, 더 나아가 두 작품 모두 성공을 거둔 희소한 사례에 노희경의 뛰어난 필력이 있었음은 분명하다.

하지만 ‘시대를 초월한 이야기’라는 말에는 또 다른 그늘도 존재한다. 이 작품은 21년이 흘렀음에도 불구하고 과거와 다를 바 없는 어머니들의 현실에 바탕하고 있다. 실제로 리메이크작에서 엄마를 제외한 다른 가족의 삶은 시대적 변화를 반영해 원작의 설정에서 조금씩 수정되었다. 아버지 정철은 과거에 비해 ‘의사가 넘치는’ 현실로 인해 한층 악화된 고용 불안을 경험하고, 막내아들 정수는 의대를 원하는 아버지의 압력에 삼수를 하는 설정으로 학벌주의 심화를 드러냈다. 결혼보다 직업적 성취에 더 열정적인 유학파 출신 커리어우먼이자, 권위적 가부장인 아버지에 대한 반감이 뚜렷한 큰딸 연수 역시 요즘의 달라진 여성상을 보여준다. 오직 주인공만 원작과 별 차이가 없다. 그때나 지금이나 시대의 변화를 반영할 만한 사회적 삶에서 격리된 전업주부 겸 기혼 여성이기 때문이다.

원작 극본에는 ‘엄마’라고만 표기되어 있고 죽음을 맞는 마지막 장면에서야 이름이 밝혀지는 주인공 김인희는 1996년에도 “우리 시대 대표 어머니”로, 2017년판에서도 “이 시대의 평범한 엄마”로 설명된다. 1942년생 김인희든, 1962년생 김인희든, 한국 사회에서 엄마로 살아간다는 것은 그렇게 보통명사로서의 삶에 불과하다.

사실 이러한 비극적 삶의 실체를 가장 잘 보여주는 인물은 원작에서도 드라마에서도 끝까지 이름이 밝혀지지 않는 ‘할머니’다. 극중에서 중증 치매를 앓는 그녀는 며느리인 인희에게 고통과 연민을 동시에 안겨준다. 젊은 시절 홀로 아들을 의사로 키우느라 모든 것을 헌신한 채 자신을 잃어버린 할머니는 만약 인희가 끝까지 살았다면 맞이했을 미래의 모습이나 다름없다.

공교롭게도 원작과 리메이크작의 ‘할머니’ 모두 같은 배우 김영옥이 연기했다는 사실이 이러한 현실을 의미심장하게 보여주고 있다.

극 이면에 깔린 잔혹한 현실에도 불구하고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이별>이 따스하고 감동적인 가족극으로 소비되는 것은 엄마의 병을 알게 된 뒤부터 이기적인 가족들이 보이는 참회의 서사 때문이다. 가령 젊은 시절 인희가 아이를 낳을 때조차 옆을 지키지 않았던 무심한 워커홀릭 남편은 아내의 병을 알고 나서야 세상에 둘도 없는 사랑꾼이 되어 아내가 최후를 맞이할 새집을 단장한다. 엄마 손으로 토사물까지 치우게 했던 사고뭉치 아들은 마지막으로 엄마를 기쁘게 해줄 기회를 달라고 사정하고, 누나를 착취하기에 바빴던 남동생은 진실을 알게 되자 후회하고 성실한 인물로 거듭난다. 여성 암환자의 이혼율이 남성 암환자의 그것에 비해 3배나 높고, 가사일로 이중고를 겪는다는 현실을 생각하면 모두와 ‘아름답게’ 이별하는 이 드라마의 결말은 더 없이 판타지적으로 보인다.

[김선영의 드라마토피아]1996년 김인희, 2017년 김인희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이별>의 이야기는 올해 뜻밖의 화제작으로 불린 KBS <고백부부>와도 겹쳐지는 지점이 있다. 결혼을 후회하는 30대 후반 부부가 18년 전으로 되돌아가 인생의 소중한 시절을 다시 경험하는 이야기를 그린 이 작품은 당초 ‘응답하라’ 시리즈의 아류작이라는 선입견을 극복하고 절절한 가족애로 호평을 얻어냈다. 특히 주인공 마진주의 애절한 사모곡이 시청자들의 눈물샘을 자극했다. 10년 전 엄마의 임종을 지키지 못한 한을 품고 살아가던 2017년의 마진주가 1999년의 과거로 돌아가 가장 먼저 마주친 건 살아있는 젊은 엄마였다. 스무 살 시절에는 철없는 막내딸이었던 진주는 결혼 뒤 독박육아에 시달리는 전업주부의 삶을 경험하고 나서야 엄마의 소중함을 깨닫고 뒤늦은 사랑을 표현한다. 모녀의 18년 시차를 극복한 공감의 힘은 결국 ‘엄마’의 삶이라는 보편적 현실이었던 것이다.

노희경 작가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이별> 방영 전 한 매체와의 인터뷰를 통해 리메이크 이유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21년 전 이 작품이 방송된 이후, 처음부터 끝까지 주인공 자체가 어머니인, 어머니만을 위한 드라마가 별로 없지 않은가. 언젠가부터 어머니에 대한 관심을 외면해버린 게 아닌가 생각이 들었다.” 정확한 진단임에도 불구하고, 21년 만에 돌아온 엄마의 이야기가 변하지 않는 현실의 재확인에 불과하다는 것은 몹시도 씁쓸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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