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실을 위한 법정

2018.04.01 21:20 입력 2018.04.01 21:21 수정

재미없는 질문 하나, “거짓말을 가장 잘하는 사람을 만나려면 어디로 가야 할까?”

물건 가격은 늘 다른데 매번 손해 보며 파는 것이라며 엄살을 떠는 동네시장 노점 아저씨, 카페에 앉아 귀에 꿀물이 가득 찰 것만 같이 달콤한 말만 주고받는 시작하는 연인들, 약속한 공약의 절반만 지켜도 세상 아름다운 동네가 될 법한 엄청난 크기의 현수막 속 웃고 있는 사람들. 우열을 가리기 쉽지 않지만, 만약 누가 나에게 물어본다면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자신 있게 답할 수 있다. 그곳은 바로 법정(法庭)이다.

[시선]진실을 위한 법정

진실을 찾기 위한 치열한 다툼이 벌어지는 성스러운 법정에서 거짓말이 가장 많이 오고 간다니 조금은 아이러니 하지만, 단언컨대 영화배우보다 능숙하고, 법률가보다 논리적이며, 어린아이보다 순수한 진짜 같은 거짓말을 나는 법정에서 매일 마주한다. 부끄러운 고백이지만 그 능수능란한 거짓말에 깜박 속아 넘어가 헛다리를 짚어 처참히 넘어진 적도 많다. 요즘 세간에 ‘위증’이 유행인데, 한 가지 분명한 것은 거짓말은 언젠가 밝혀지고, 영원히 감출 수 있을 것 같았던 진실은 시간이 지나면 완연한 햇볕 아래 결국 그 모습을 드러내게 된다는 것이다.

여기 오랫동안 외면된 진실을 마주하기 위한 독특한 법정이 준비되고 있다. 이달 21일(토)부터 양일간 열리는 ‘베트남전쟁 시기 한국군에 의한 민간인 학살 진상규명을 위한 시민평화법정’이 바로 그것이다. 한 번에 읽기 어려울 만큼 긴 이름을 가진 ‘시민평화법정’은 말 그대로 시민이 참여해 만드는 법정이다. 베트남전쟁은 과거 우리나라와 같이 남과 북으로 나누어져 있던 베트남에서 1955년부터 1975년까지 약 20년 동안 계속되었던 전쟁이다. 냉전시대 자본주의 진영과 공산주의 진영이 지원하고 참전한 대리전쟁이자 국제전쟁이었다. 한국도 전쟁에 참전하여 수많은 지상군을 파병했다.

시민평화법정은 베트남전쟁 시기에 참전했던 한국군이 저지른 베트남 민간인 학살의 진상을 용기 있게 마주하고자 한다. 그동안 베트남 곳곳에 세워진 한국군 증오(憎惡)비, 참전했던 군인들의 고백, 미국과 베트남 정부가 기록한 기밀문서 등에서 당시 파병된 한국군에 의한 민간인 학살 의혹은 꾸준하게 제기되어 왔다. 그러나 우리 정부가 공식적으로 그 내용을 확인하거나 이에 대해 책임 있는 사과를 한 사실은 없다. 지난 2월 베트남을 방문한 문재인 대통령도 “우리 마음에 남아 있는 양국 간의 불행한 역사에 대해 유감의 뜻”을 표명했지만, 그 불행한 역사를 우리는 아직 제대로 알지 못한다.

시민들이 만드는 법정이지만 그 짜임새가 결코 헐겁지 않다. 한국 군인에 의해 가족을 잃은 피해자가 직접 법정에 선다. 오랫동안 이 문제를 조사하고 연구한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민변)’의 변호사들이 대리인으로 참여한다. 쌍방의 변론을 듣고 판결을 내릴 재판부로는 ‘김영란 법’으로 널리 알려진 김영란 전 대법관, 전 세월호특별조사위원회 위원장이자 후배들이 존경하는 선배 변호사로 손꼽히는 이석태 변호사, 서울대 법대 최초의 여교수이자 평생 여성인권과 법여성학을 연구해온 양현아 서울대법학전문대학원 교수가 참여한다. 거짓이 난무하는 법정과 피해자의 목소리가 지워진 역사를 딛고 오로지 진실을 마주하기 위해 열리는 법정이다.

시민평화법정의 판결문은 법적으로는 아무런 힘이 없다. 그러나 진실이 가지는 힘은 강력하다. 인종차별(아파르트헤이트)이 극심했던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초대 헌법재판관 알비 삭스는 인종차별주의자로부터 테러를 당해 한쪽 팔과 눈을 잃었지만 ‘진실을 밝히는 가해자는 결코 처벌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지켰다. 그리고 이를 통해 밝혀진 ‘진실’은 가해자를 처벌하지는 않았지만 이를 넘어 한 사회를 바꾸어 내는 거대한 원동력이 되었다. 슬픈 4월, 용기 있게 지난 역사의 진실을 마주하려는 시민평화법정을 응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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