⑩“재판 신뢰 다 무너져, 국민이 만족할 때까지 할 수 있는 건 다 해야”

2018.06.07 17:48 입력 2018.06.07 22:11 수정

진상규명 요구 나선 춘천지법 류영재 판사

류영재 춘천지법 판사가 지난 6일 강원 춘천의 한 커피숍에서 경향신문과 인터뷰하고 있다. 류 판사는 “사법부가 부끄러운 역사를 숨겨서 국민이 모르고 지나가면 주권행사 영역 일부를 빼앗기는 것”이라며 “은폐는 역사에 죄를 짓는 일”이라고 말했다. 김기남 기자 kknphoto@kyunghyang.com

류영재 춘천지법 판사가 지난 6일 강원 춘천의 한 커피숍에서 경향신문과 인터뷰하고 있다. 류 판사는 “사법부가 부끄러운 역사를 숨겨서 국민이 모르고 지나가면 주권행사 영역 일부를 빼앗기는 것”이라며 “은폐는 역사에 죄를 짓는 일”이라고 말했다. 김기남 기자 kknphoto@kyunghyang.com

무릎을 탁 쳤다. “심판을 못 믿으면 경기는 없는 거다.” 강문대 변호사가 페이스북에서 ‘양승태 대법원’의 사법농단을 비판하며 쓴 표현이다. 심판이 공정하다는 전제에 선수들이 동의하지 못하면, 올림픽도 월드컵도 불가능하다. 난투극으로 점철되고 말 것이기에. 이번 사태는 분쟁의 종결자인 법관이 헌법적 의무인 ‘독립적 심판’을 포기하고 직접 ‘플레이어’로 뛴 것이다. 페어플레이는커녕 최악의 비열한 플레이였다. 법관 직무의 모든 것인 재판을 매개로 ‘딜(deal·거래)’을 시도했다. 과장이 아니다. 2015년 8월 법원행정처(행정처)가 작성한 ‘VIP 면담 이후 상고법원 입법 추진전략’에는 ‘빅딜 카드’란 표현이 등장한다.

일부 보수언론에선 계획만 있고 실행되지 않았으니 문제없다고 한다. 실행 여부는 추가 규명이 필요하다. 설사 ‘미수’에 그쳤다 해도 본질은 달라지지 않는다. 심판이 사익을 위해 특정 팀을 도우려는 계획을 세웠는데 실행은 못했다고 치자. 문제가 없나. 이런 심판들이 다시는 휘슬을 불지 못하도록 하자는 게 시민과 대다수 판사들의 요구다. 사법행정권 남용 의혹 특별조사단(특조단) 보고서가 나온 뒤 적극적으로 진상규명을 요구하고 있는 류영재 춘천지법 판사(35·사법연수원 40기)를 지난 6일 춘천의 한 커피숍에서 만났다. 류 판사는 국민대 시각디자인과 출신이다. 만화가가 되려고 미대에 갔다가 졸업한 뒤 진로를 바꿨다. 2011년 연수원 수료 때 10등 안에 든 실력파다. 현재 전국법관대표회의 구성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 특조단 보고서 내용을 페이스북에서 설명하고, 방송 인터뷰에도 응하고 있다. 현직 판사로서 쉽지 않은 일일 텐데.

“2015년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수사팀이었던) 박상옥 대법관이 제청될 때, 박노수 판사가 코트넷(법원 내부망)에 ‘제청을 거둬달라’는 글을 썼다. 답글을 달았더니 법원장께서 부르셨다. 행정처에서 법원장에게 전화해 ‘이게 춘천지법 배석판사들 뜻이냐’고 물어봤다더라. 개인 의견이라 답하고 글을 삭제했다. 그 경험이 트라우마가 됐다. 내가 글을 쓰면 소속 법원과 동료들에게 폐가 되는구나 싶었다. 이후 국가정보원이 경력법관 면접에서 사상검증한 사건이 터졌다. 트라우마가 떠올라 글을 못 올리겠더라. 행정처 아는 분에게 연락해서 전수조사 건의하는 정도의 행동만 했다. 결국 일부가 사실로 밝혀졌는데도 법원 차원의 공식 항의 입장발표는 없었다. 행정처장 명의의 다섯 줄짜리 내부공지만 떴다. 그때 깨달았다. 이렇게 가만히 있으면 역사는 ‘판사들이 침묵했다’고 기록하겠구나. 앞으로는 절대 가만있지 않겠다고 결심했다. (이번 사태에서도) 저 보고 ‘관종(관심종자)이냐’ ‘저러다 정치하겠지’ 하는 시선이 있을 거다. 하지만 이번 사태가 국민에게 투명하게 공개돼야 한다는 확신하에 국민에게 알리는 것뿐이다. 국가의 사법기능은 판사가 수행하지만, 판사의 것이 아니다. 사법기능이 제대로 이뤄지는지 국민이 감시할 수 있어야 한다. 사법부가 부끄러운 역사를 숨겨서 국민이 모르고 지나가면, 주권행사 영역 일부를 빼앗기는 것이다. 은폐는 역사에 죄를 짓는 일이다.”

- 이번 사태의 핵심은 뭐라고 보나.

“사법부는 군부독재 시절 정권에 전적으로 협력한 흑역사가 있다. 지금 여러 사건에서 재심이 이뤄지고 있지 않나. 사법부가 정권과 거리를 두는 일에는 심하다 싶을 정도로 예민해야 옳다. 그 부분이 정면으로 흔들린 거다. 재판개입이 실제 있었는지를 떠나 재판의 외관상 공정성과 신뢰가 완전히 무너졌다. 초점은, 사법부가 스스로 재판을 놓고 ‘청와대와 협력했다’ ‘협력하겠다’ ‘청와대가 요구 안 들어주면 협력 않겠다’고 한 거다. 삼권분립을 정면으로 위반했다. 이런 사실들이 드러났는데, 법원에서 ‘립서비스에 불과하고 실제로는 재판을 그렇게 안 했다’고 한들 국민이 믿겠나.”

[김민아의 후 스토리]⑩“재판 신뢰 다 무너져, 국민이 만족할 때까지 할 수 있는 건 다 해야”

- ‘외관의 공정성’이란 무슨 의미이며 왜 중요한가.

“재판은 실체가 공정한 것도 중요하지만 절차의 적법성 등을 보이는 것도 중요하다. 실체적 공정성이 해(害)하여졌다는 점은 재판부가 양심선언하지 않는 이상 입증이 어렵다. 재판부가 가족이나 지인의 재판을 스스로 회피하는 제도가 있는 것도 외관의 공정성을 위해서다. 판사는 진행 중인 사건에 대해 외부에 이야기할 때 신중해야 한다. 양승태 전 대법원장 시절 한 판사가 ‘원세훈 1심 판결’을 ‘지록위마’라고 비판했다가 정직 2개월의 중징계를 받았는데 징계 이유가 재판신뢰 하락이었던 것으로 알고 있다. 바로 그 대법원장 휘하 행정처에서, 청와대에 재판을 거래수단·협력수단·홍보수단으로 이야기하겠다는 계획을 세우고 일부는 (실행)했다. 게다가 양 전 대법원장은 대법원의 수장이다. 대법원 재판의 ‘외관의 공정성’이 깨진 것이다. 보고서에서 원세훈 사건(전원합의체 회부 이후 원심 파기), 전교조 법외노조 효력 집행정지 사건(원심 파기) 등을 주목하고 있다. 이들 사건은 문건이 작성된 시점이 선고 이전이고, 선고 결과가 시나리오와 일치한다. 판사로서는 재판개입이 없었다고 믿고 싶지만, 믿음일 뿐이다. 문건과 결과를 본 국민은 정말 믿기 어려울 거다. 사법부가 이만큼 외관의 공정성을 무너뜨렸으면 실체적 공정성은 언급할 필요조차 없는 것이다. 실제 개입 여부를 따질 것도 없이 재판의 정당성은 무너졌다.”

국정원 경력법관 사상검증 사건
법원 차원 항의조차 없는 것 보고
앞으로 절대 침묵 않겠다고 결심

재판거래 시도만으로 헌법 위반
검찰·특검 가릴 수 있는 처지 아냐
문제 된 판결 ‘재심 특별법’ 공감
문건 다 공개해 ‘날것’ 보게 해야

- 문건을 작성한 행정처 심의관들은 지시에 따른 것뿐인가. ‘탄핵해야 한다’ ‘징계 전이라도 재판에서 배제해야 한다’는 등의 요구가 나온다.

“원칙만 이야기하면, 면책은 불가하다. 모두 10년차 이상 법관이다. 법관은 임관 때부터 독립기관이고 3급 고위공무원 대우를 받는다. 심의관 정도면 부당한 지시를 거부할 수 있다. 거부한다 해도 파면당하지 않는다. 불이익은 보직변경 정도다. 보고서를 보면 (심의관들이) 소극적이지 않다. 적극적으로 가담했다. 국정원 보고서도 이렇게 잘 만들지는 않았을 것 같다. 가장 걱정되는 건 재판을 경시하는 이분들이 재판 업무를 할 때, 재판 당사자들을 어떻게 대우할까이다.”

- 각 법원 판사회의에서 대체로 검찰 수사가 필요하다는 의견이 많다. 향후 조치에 대한 생각은.

“우선 전체 410개 문건을 모두 공개해야 한다. 특조단 보고서를 볼 때와 문건을 볼 때 느낌이 다르다. 문건을 보니 심각성이 더 느껴진다. 이것만으로도 문건 공개는 의미가 있다. 국민도 직접 날것을 볼 권리가 있다. 사법신뢰를 세우려면 국민이 만족할 때까지 할 수 있는 건 다 해야 한다. 법원은 어떤 요구든 따라야 한다. 검찰 수사냐, 특검 수사냐 가릴 처지가 아니다. 보고서만 봐도, 임종헌 전 행정처 차장의 직권남용 혐의 등은 충분히 수사에 착수할 만한 수준이다. 재판개입 여부 규명은 쉽지 않겠지만, 국민이 바라면 해야 한다. 만약 재판개입 사실을 밝혀내지 못하더라도, 재판의 공정성이 되살아나는 건 아니다. 개입이 있고 없고를 떠나, 사법부가 헌법을 스스로 위반한 것이다. 재판개입만 없으면 괜찮다는 분들에게 묻고 싶다. 김명수 대법원장 휘하 행정처에서 ‘문재인 정부에 협력하겠다’는 문건 만들고, 그게 공개된다 해도 괜찮다고 할 건가. 문제는, 판결의 정당성은 무너졌지만 효력이 무너진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현행법상은 구제할 길이 없다.”

- 법조계 일부에선 ‘양승태 헌정유린에 관한 특별법’을 만들고, 판결에 문제가 드러나면 재심을 청구할 수 있게 하는 방안도 특별법에 포함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입법적 조치가 필요하다는 데 공감한다. 처분적 법률로서 위헌 시비가 제기될 가능성이 있지만, 5·18특별법 등을 제정한 선례가 있다. 다만 사법부가 이를 제안할 수 있는 처지는 아니다.”

- 차관급 대우를 받는 서울고법 부장판사들은 수사 반대 입장을 밝혔다.

“검찰이 사법부에 들어오는 전례를 만들어선 안된다는 우려는 이해한다. 그러나 ‘향후 관련 재판을 담당하게 될 법관에게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한 부분은 이해하기 어렵다. 과거에도 판사들 비리를 윤리감사관이 수사의뢰나 고발한 사례가 있다. 그때마다 행정처 영향을 받아서 재판에 문제가 생겼다는 건가. 개인적으로 대법원장이 직접 고발하는 문제에 대해선 고민이 있다. 대법원 수장이기도 하니까. 그러나 행정처장이나 윤리감사관의 수사의뢰가 개별 재판부에 영향을 줄 수 있다는 생각은 납득할 수 없다.”

- 조선일보가 이번 사태와 관련해 ‘프레임’ 짜기를 시도한다고 페이스북을 통해 비판해왔다. 특조단이 제목만 공개한 문건에 ‘조선일보’가 포함된 사례만 10건이다. 그럼에도 문건 내용은 전혀 공개하지 않았다.

“지난해 6월 판사들이 전국법관대표회의 만들자고 논의할 때, 제가 페이스북에 ‘친구 공개’로 쓴 글이 한국경제와 조선일보에 보도됐다. 기사가 나면서 정치판사로 낙인찍혔다. 조선일보 등 일부 보수언론이 국제인권법연구회 회원들을 정치판사로 모는데, 우리법연구회가 와해될 때와 똑같다. 앞으로도 판사들이 법관독립·인권보장을 고민하며 모임을 만들면 조선일보는 정치판사로 몰아갈 가능성이 높다. 사법부가 특정 언론에 의해 순치되고, 통제되고, 판사들이 자기검열하는 상황은 불행하다. 더 이상 조선일보가 사법부를 흔들게 놔둬선 안된다.”

류 판사는 2시간여 인터뷰 내내 날카롭고 열정적이었다. 시민에게 바라는 점을 묻자 목소리를 낮추곤 힘주어 말했다.

“저도 판사입니다. 재판의 신뢰가 무너지는 게 무섭습니다. 저처럼 재판독립을 고민하고 이 사태를 두렵게 생각하는 판사들이 많습니다. 국민들이 원하는 만큼 (판사들은) 강하게 나갈 수 없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더 이상 판사들이 가만히 있지만은 않을 겁니다. 국민이 보기에는, 이번 일을 저지른 판사나 그렇지 않은 판사나 구분하고 싶지 않겠지만…. 박시환 전 대법관이 2003년 사법파동 때 사직서를 제출하며 ‘좋은 재판을 하고 싶었다’는 말씀을 했습니다. 박 전 대법관처럼 좋은 재판을 하고 싶다는 판사들이 다수라고 믿고 있어요. 이렇게 인터뷰하는 것도 법원에 계속 있고 싶어서입니다. 좋은 재판이 가능해야 법원에 계속 남을 수 있을 것 같으니까요. 판사들이 좋은 재판에 집중할 수 있는 그런 법원이 되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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