⑫그들의 타는 목마름 씻을 ‘물 한 잔’은 일터로 돌아가는 것이다

2018.07.23 21:48 입력 2018.07.23 21:52 수정

폭염 속 거리에 선 노동자들

KTX 해고승무원 복직 합의가 이뤄진 21일 서울역 천막농성 해단식에서 김승하 KTX열차승무지부장(왼쪽) 등이 기뻐하고 있다. 조창익 전교조 위원장이 19일 청와대 앞에서 ‘법외노조 통보 직권취소’를 요구하며 단식농성을 하고 있다. 지난 5월22일 ‘파인텍 공동행동’이 홍기탁·박준호씨의 고공농성 200일을 앞두고 오체투지 행진을 하고 있다. 금속노조 쌍용차지부 조합원 등이 22일 서울 대한문 앞에서 열린 ‘쌍용차 위로와 연대의 날’ 행사에서 아이스커피를 받아가고 있다(위부터).  이상훈 선임기자·권도현 기자·연합뉴스

KTX 해고승무원 복직 합의가 이뤄진 21일 서울역 천막농성 해단식에서 김승하 KTX열차승무지부장(왼쪽) 등이 기뻐하고 있다. 조창익 전교조 위원장이 19일 청와대 앞에서 ‘법외노조 통보 직권취소’를 요구하며 단식농성을 하고 있다. 지난 5월22일 ‘파인텍 공동행동’이 홍기탁·박준호씨의 고공농성 200일을 앞두고 오체투지 행진을 하고 있다. 금속노조 쌍용차지부 조합원 등이 22일 서울 대한문 앞에서 열린 ‘쌍용차 위로와 연대의 날’ 행사에서 아이스커피를 받아가고 있다(위부터). 이상훈 선임기자·권도현 기자·연합뉴스

‘덥다’는 말로는 충분하지 않다. 낮기온이 사람 체온을 웃돌고, 아침기온조차 30도 아래로 떨어지지 않는 초열대야는 기상현상을 넘어서는 재난이다. 거리는 재난의 현장이다. 사람들은 거리에서 도망쳐 극장과 마트와 커피숍으로 대피한다. 그러나 뜨거운 거리를 떠날 수 없는 사람들도 있다. 한 마디라도 더, 한 사람에게라도 더 자신의 이야기를 전하려는 노동자들이다. 그들의 목소리를 들어봤다.

■ 7월19일 오후 2시, 서울역(서부) 광장, 33.1도

두 번째 단식 들어간 전교조 위원장, 다시 차려진 쌍용차 희생자 분향소
세 번째 계절 버티는 파인텍 굴뚝농성…

파란 천막은 볕을 가리는 데 역부족이었다. 천막에 들어가느라 잠시 벗어뒀던 신발을 다시 신다가 데이는 줄 알았다. 2006년 해고된 KTX 승무원들은 이곳에서 복직을 요구하며 57일째 농성 중이었다. 그들의 표정은 비교적 평온했다. 해고 이후 12년 동안 단식, 삭발, 고공농성, 사상 초유의 대법원 대법정 시위까지 겪은 ‘짬밥’ 때문이 아닐까 생각했다. 제민경씨(37)에게 물었다.

- 더위를 어떻게 견디는지요.

“동료들과 수다도 떨고…. 투쟁이다 생각하는 게 아니고, 인생의 자연스러운 한 부분이라 여기고 있어요. 긍정적으로 생각하며 버티고 있습니다.”

- 서른일곱이니 인생의 3분의 1을 싸움으로 보내는 셈입니다.

“인생을 새옹지마라 하지요. 희망이 있어 그걸 바라보며 여기까지 왔습니다. 외부에서 도와주는 분들도 계시고….”

제씨는 복직 투쟁 중에 결혼했다. 초기에 유산을 겪었는데, 1심에서 승소하자 바로 아이가 생겼다. 아침에 아이를 등교시킨 뒤 농성장에 나왔다고 했다. 주중에 출장이 많은 남편은 주말이면 아이를 돌봐주며 “가서 싸우라”고 격려해준다.

“우리가 틀리지 않았음을 보여주고 싶어요”…
더위에 쓰러질지언정 거리를 떠날 수 없는 이유

- 복직하게 된다면 어떤 삶을 살고 싶은가요.

“내 아이한테 엄마가 틀리지 않았다는 걸 보여주고, 불합리한 건 불합리하다고 떳떳하게 말하는 노동자가 되고 싶어요.”

옆에 있던 차미선씨(37)도 투쟁 중 결혼해 1남1녀를 얻었다. 초등학생인 큰아이는 엄마가 승무원으로 일하는 기차를 타보고 싶어한다. 차씨는 “외국 항공사를 타면 연륜 있고 노련한 승무원들이 많지 않나. 복직하게 되면 노련한 승무원이 돼 가족들에게 일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다”고 말했다.

조합원 33명을 이끌어온 김승하 철도노조 KTX열차승무지부장(39)을 만났다.

- 폭염으로 고통이 심할 것 같습니다.

“장마 때는 바람이 많이 불어 천막이 날아가는 줄 알았어요. 그런데 더위가 사람을 더 진 빠지게 하네요. 중간중간 화장실 가서 물 가져와 천막 주변에 뿌립니다. 10분 정도 괜찮다가 순식간에 다시 더워지지만요.”

천막을 친 다음날 ‘양승태 사법농단’이 모습을 드러냈다. 양 전 대법원장 당시 법원행정처가 “VIP(박근혜 대통령)의 원활한 국정운영을 뒷받침하기 위해 협조해온 사례”라며 KTX 사건을 거론한 문건이 공개됐다.

- 2015년 2월26일로 돌아가보지요. 1·2심을 뒤집은 대법원 판결을 들었을 때 심경이 어땠습니까.

“현실부정이라고 해야 하나, 한동안 멍했습니다. 이번에 ‘재판 거래’ 의혹 문건을 접하고는 ‘올 것이 왔다’는 느낌이었어요. 심증만 있었는데 물증이 나온 기분이랄까요.”

- 12년 동안 버텨낼 수 있었던 힘은 무엇인가요.

“사람이죠. 옆에서 함께해온 친구들. 그들이 있어서 ‘나는 혼자 갈래’ 할 수 없었습니다.”

- 대법정에 들어가 시위를 벌였습니다. 이후 대법원의 움직임이 있습니까.

“없습니다. KTX 사건 주심이었던 고영한 대법관이 아직 컴퓨터 하드디스크도 안 내놓고 있잖아요. 수사 대상자들이 대법원에 남아 스스로를 변호하는 상황입니다. 대법원이 신뢰를 회복하고 싶으면 잘못을 인정하고 직권 재심을 해야 합니다. 복직된다 해도, 다른 사법농단 피해자들과 연대해서 법적 명예회복을 위한 공동행동을 이어갈 겁니다.”

■ 7월19일 오후 4시45분, 청와대 앞 진명초소, 33.7도

기온은 더 올랐다. 그늘이라 그나마 다행이다. 조창익 전국교직원노동조합(전교조) 위원장의 단식 농성이 나흘째 이어지고 있었다. 그는 “전교조 법외노조 통보를 직권취소해달라는 절박한 요구를 알리기 위해 단식을 선택했다”고 말했다. 2013년 고용노동부로부터 ‘노조 아님’ 통보를 받은 전교조는 잘못된 행정행위를 바로잡을 권한과 책임이 행정기관에 있다며 정부의 직권취소를 요구하고 있다. 그러나 청와대는 교원노조법 개정이나 대법원 판결로 해결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 지난해도 28일간 단식한 걸로 압니다. 폭염 속 건강엔 문제가 없습니까.

“아무래도 지난번보다 힘듭니다. 땀이 많이 나서 소금기를 자주 보충해야 해요. 하지만 현장 교사들의 열망은 지금 날씨보다 더 뜨거울 겁니다.”

- 정부와 평행선을 긋고 있는데요.

“ ‘양승태 사법농단’으로 우리 주장의 설득력이 더 커졌습니다. 전교조의 법적 지위가 무려 7번이나 바뀌었어요. 사법농단의 산물이라는 강력한 정황이지요. 정부가 적폐청산 차원에서 정치적 결단을 해야 합니다.”

- 전교조가 법외노조 굴레를 벗는 일과 교육현장은 어떤 관계가 있습니까.

“종북 이데올로기 덧씌우기가 10년 가까이 계속됐습니다. 새로운 세상이 됐다, 촛불교육 하자 했는데 기회 자체가 봉쇄되니 서럽습니다. 해직자 30여명에 직위해제·중징계자 20여명까지 50여명이 교사 역할을 못하고 있어요. 모두 빨리 교단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전교조가 교육당국과 단체협약 맺고, 정책 생산하고, 현장에서 실천할 때 교육개혁의 동력을 되찾을 수 있습니다.”

■ 7월20일 오후 3시40분, 덕수궁 대한문 앞, 34.1도

2013년 대한문 앞을 떠났던 쌍용차 희생자 분향소가 다시 대한문 앞에 차려졌다. 지난달 목숨을 끊은 김주중씨의 죽음이 계기가 됐다. 김씨는 2009년 쌍용차 정리해고 사태 이후 서른 번째 희생자다. 쌍용차 노사는 2015년 말 ‘2017년 상반기까지 해고자 전원 복직에 노력한다’고 합의했으나, 일부만 복직했을 뿐이다. 쌍용차 사건 역시 ‘양승태 대법원’의 재판거래 의혹 대상으로 지목되고 있다.

우여곡절 끝에 복직한 이창근씨(전 금속노조 쌍용차지부 기획실장·휴직 중)를 천막에서 만났다. 숨이 턱턱 막혀왔다.

- 폭염에 고충이 크겠습니다.

“여성 노동자가 중심인 KTX 농성장은 대화를 많이 나눈다고 들었습니다. 남성 중심인 여기는 좀 다릅니다. 각자 견디는 거죠.”

- 문재인 대통령이 쌍용차 최대주주인 마힌드라 그룹 회장을 만나 해고자 문제 해결을 당부했습니다. 변화가 있는지요.

“당사자들 입장에선 ‘땡볕에서 가장 필요한 건 칼럼이나 성명이 아니라 물 한 잔’이라고 합니다. 대통령이 마힌드라 회장에게 당부한 것은 고마운 일입니다. 그런데 쌍용차 경영진은 고민이 없는 것 같습니다. 경영진 가운데 단 한 명도 조문을 오지 않습니다. 노동부도 조금 더 의지를 갖고 문제 해결에 나서줬으면 합니다.”

■ 7월21일 오후 8시30분, 서울 목동열병합발전소 75m 높이 굴뚝, 31.5도

금속노조 충남지부 파인텍지회의 홍기탁·박준호씨는 모기업 스타플렉스가 노조에 약속한 공장 정상화와 단체협약 이행 등을 촉구하며 고공농성 중이다.

지난해 11월12일 시작한 농성은 영하 17도의 혹한을 지나 최악의 폭염까지 250일 넘게 계속되고 있다. 사람 한 명 지나가기도 힘든 폭 80㎝의 철제 통로에 간신히 천막을 쳐놓고 농성을 이어가고 있다. 그들을 취재하게 된 것은 쌍용차 이창근씨의 당부 때문이었다. 이씨는 “우리 문제 생각하다가도 뒷골이 서늘해질 때가 있다. 파인텍 고공농성이 생각날 때”라고 했다. 홍씨와 전화 통화를 했다.

그는 “노동자들이 노동조합을 결성한다는 일 자체가 상당한 결단”이라며 “헌법에서는 노동 3권을 보장하고 있지만, 현실에서는 잘 적용되지 않고 있다. 쌍용차·콜트콜텍 사태가 모두 마찬가지”라고 지적했다. 폭염에 건강을 어떻게 관리하는지 물었다. “일과를 규칙적으로 보냅니다. 그렇지 않으면 정신이 흐트러지니까요. 매일 오전 10시와 오후 5시에 식사와 물이 담긴 가방을 아래서 올려줍니다. 물을 아껴 써야 해서 물수건에 적셔 몸을 닦고 있습니다. 오전·오후 운동 시간도 반드시 지키고요.”

22일에는 의료진 3명이 굴뚝에 올라 홍·박씨의 건강상태를 확인했다. 이들은 “농성자들의 근골격계 통증이 심하고 근력이 약해지고 있다. 스트레스가 계속되다보니 심리적 부분도 우려된다”고 말했다. 이날 서울의 최고기온은 38도였다. 농성자들이 갖고 있는 온도계는 40도를 넘을 때도 있다.

4526일 만에 복직 합의, 너무 길었던 KTX 해고 노동자들의 투쟁…
모두들 너무 늦기 전 본래의 자리로 돌아가길 빈다

“싸워봐야 안되는 거다, 계란으로 바위 치기다, 그런 얘기 많이 들었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끝낼 수는 없다는 믿음 하나로 버텼습니다.” 김승하 지부장을 비롯한 KTX 해고 노동자들이 4526일 만에 회사로 돌아가게 됐다. 천막에서 그들을 만난 지 이틀 후의 일이다. 다행이지만 12년2개월은 너무 길었다.

KTX 승무원들은 천막을 철거했으나 더 많은 노동자들이 거리와 하늘에 있다. 그들도 하루빨리 천막을 걷고, 단식을 중단하고, 굴뚝에서 내려올 수 있기를 바란다. 사법과 정치가 제 역할을 한다면 가능하다. ‘양승태 사법농단’의 진실을 밝혀내는 일은 그 첫걸음일 것이다.

<시리즈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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