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멸 위기에 처한 한국의 종교들

2018.08.31 20:24 입력 2018.08.31 20:27 수정

신학대 교수로 재직하다 파면당한 모 교수가 이 학교를 상대로 낸 파면처분 무효 확인 소송에서 최근 승소했다. 1심 재판부가 해당 교수를 복직시키라는 판결을 내린 것. 그는 개신교 신자가 불상을 파괴한 것에 양심의 가책을 느껴 참회의 심정으로 복구비용을 마련했는데, 대학이 그것을 트집 잡은 것이다. 종교 간 대화의 마당에서 만날 때마다 나는 그의 인품에 고개가 숙여진다. 그런데 예수와 같이 다른 사람의 죄를 대신 짊어진 것이 도대체 무슨 죄란 말인가.

[사유와 성찰]소멸 위기에 처한 한국의 종교들

댓글을 보면 대중들이 사태의 본질을 더 잘 알고 있다. 대중들은 ‘내 종교가 소중하면 다른 사람의 종교도 소중하게 대해야 한다’ ‘내가 인정받고 존중받고 싶으면 상대를 인정하고 존중해야 한다’고 꾸짖고 있었다. 거꾸로 세상이 종교를 걱정해야 하는 시대가 온 것이다. 세습, 도박, 성추행, 사기 같은 말은 이제 종교와 동급의 언어가 되어버렸다. 왜 한국의 종교계는 이처럼 갈수록 추락하는 걸까.

이는 종교인들의 미성숙이 원인이지만, 거시적인 차원에서는 근대 이후 종교의 세속적 권력이 쇠퇴한 것에 연유한다. 특히 과학, 자본주의, 국가가 신적인 영역을 차지함으로써 자신의 영토가 줄어든 것에 대한 종교의 히스테리라고 볼 수 있다. 도구적 이성이 승리하고, 이를 발판으로 욕망의 판도라가 열리기 시작했다. 상대의 절멸을 목표로 한 국가적 전쟁의 참상 속에서 그것을 전복시킬 힘을 잃은 종교는 설 자리마저 잃게 된 것이다.

조물주의 위치에 서게 된 과학은 창조적 능력을 갖게 됐다. DNA의 염기배열 정보를 해독하고 그것을 마음대로 바꿈으로써 새로운 생명의 질서를 바꿀 수 있다. 자본주의는 종교가 배척했던 물적 욕망을 성취하게 하고, 중독성 있는 물신을 내세워 인간의 양심을 마비시키고 있다. 자신의 정당성을 보증해주었던 종교 대신 국가는 민주주의라는 제도를 통해 스스로의 성스러움을 확립하고 있다. 국민들은 헌법과 법률이라는 경전을 읽으면서 국가권력에 복종하는 신자다.

그렇다고 각각 신적 권위를 확보한 ‘3각 편대’가 종교와의 경쟁에서 완전히 승리한 것은 아니다. 과학이 명석한 두뇌로 세계를 분석한다고 해도 애초에 조물주가 왜 그러한 질서를 세웠는지에 대해서는 알지 못한다. 욕망을 가신으로 둔 자본주의는 만족할 줄 모르는 인간의 방종과 무절제를 제어할 수 없다. 생산, 유통, 소비가 무한히 발전해야 행복하다고 믿는 한 인류는 결국 지구를 거덜 낼 것이다. 이 상태로는 다른 행성에서 자원을 가져와야 한다. 국가는 단일한 언어, 민족, 이념이라는 환상이 만들어낸 권력의 집합체로 오늘날 대부분의 갈등·분쟁의 원인이 되고 있다. 인간은 새들처럼 이 나라 저 나라를 마음껏 돌아다니지 못한다. 국경은 유목민적인 인간의 원초적 삶을 폐쇄적인 삶의 구조로 고착화시켰다.

현실은 이러함에도 왜소해진 종교는 과거 각 지역을 호령하던 자신들의 투지를 잃어버렸다. 오히려 과학, 자본주의, 국가의 지배를 받고 있다. 특히 근대에 들어서 종교는 이들에게 완패함으로써 재기의 발판조차 마련하지 못하고 있다. 이제 종교는 소멸의 길을 걸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지금의 말기적 증상은 다음과 같은 징후에서도 나타난다.

무엇보다도 자신의 교조 또는 종조의 말씀을 배반하고 있다. 아울러 배고프고 가난한 이웃을 돌보라고 했는데 돈 많은 부자들만 쫓아다니느라 자신의 존재 이유를 망각한다. 힘없는 백성은 내팽개치고 권세 있는 사람만을 우대한다. 교단 내 권력과 명예를 독점한 일부가 자신의 종교를 갈가리 분열시킨다. 종교는 사회를 정서적으로 통합하는 구심 역할을 한다. 하지만 사회는커녕 그 좁은 교단 안에서 끼리끼리 세력을 키워 파벌을 만들고, 구성원이 말을 안 듣는다고 탄압한다면 도대체 그 종교가 세상을 향해 무슨 권위가 서겠는가.

그러함에도 나는 여전히 종교가 살아남을 가능성은 있다고 본다. 모든 물욕과 권세와 명예로부터 자유롭고, 해탈한 마음과 눈빛으로 이웃을 바라본다면 마지막 희망은 있다. 그리고 종교 안으로의 욕망을 밖으로 돌려 세상의 정의와 평화를 향한 더 큰 욕망으로 나아간다면, 피곤에 지친 세상 사람들은 자신들의 몸을 종교에 기대고 싶어 할 것이다. 종교는 세속과 함께하면서도 결단코 세속을 초월한 힘을 갖추어야 한다. 불교에서 연꽃이 왜 수행자를 상징하겠는가. 삼독오욕(三毒五慾)의 번뇌와 같은 시궁창 속에서도 아름답고 향기로운 꽃을 피워내기 때문 아닌가. 어차피 과학, 자본주의, 국가도 인간의 영역이다. 인간들이 더 이상 나아갈 수 없는 모순의 한계에 이르렀을 때, 그 해법을 향기 나는 종교에게 묻게 될 날이 반드시 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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