촛불다중의 균열

2018.08.31 20:40 입력 2018.08.31 20:48 수정
임혁백 고려대 명예교수·광주과기원 석좌교수

4·19혁명과 6월항쟁은 비교적 동질적인 시민이 주도한 민주혁명이었다면, 2016~2017년에 일어난 촛불혁명은 다중(multitude)이 주도한 혁명이었다.

다중이란 다양한 정체성을 가진 개인들의 집합을 의미한다. 세계화로 국경이 개방되면서 이주민들이 유입됐고, 탈산업화로 전통적 계급과 다른 범주의 노동자 집단이 등장했으며, 탈근대화로 다양한 비경제적 범주가 나타나면서 다중사회가 형성되었다.

[세상읽기]촛불다중의 균열

다중을 구성하는 이질적인 집단 간의 소통을 가능하게 한 것은 온라인 소통수단이었다. 2016년 가을, 한국의 이질적인 다중들은 온라인에서 소통하여 광화문광장에서 오프라인 집회를 열었다. 연인원 1700만명의 다중들은 ‘박근혜 퇴진’이라는 공통분모를 바탕으로 자신들의 다양한 요구를 개진하였다.

광장에서 자유주의자들은 세월호 참사가 시민적 자유와 권리가 침해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고 규탄했다. 2030세대는 청년실업, 4050세대는 집값폭등, 6070세대는 노령빈곤에 대한 불만을 폭발했다. 물론 전통적인 계급운동의 범주에 드는 노동자·농민들이 참여했지만 비경제적 범주 집단의 불만도 크게 들렸다. 탈근대적인 페미니즘 운동이 표현주의적으로 발산됐고, 환경주의자·반원전주의자·평화주의자들의 목소리도 광장을 흔들었다.

이러한 이질적이며 작은 목소리들이 하나가 되어 거대한 함성을 질렀다. 이 함성이 현직 대통령을 탄핵시켰고, 자신들의 목소리에 응답하겠다는 정부를 탄생시켰다.

그런데 다중이 탄생시킨 문재인 정부의 지지기반이 약화되고 있다. 문재인 정부는 2017년에는 적폐청산과 전환기 정의 세우기, 2018년에는 남북평화체제의 구축 노력으로 촛불다중의 지지를 꾸준히 받았다. 지방선거에서는 압승이라는 보상을 받았다. 그러나 지방선거 이후 촛불다중연대에 균열이 일어나고 있다. 균열의 조짐은 미투 운동과 같은 페미니즘 운동에서부터 시작되었다. 미투 운동은 지방선거에서 중대 이슈로 부상했다. 지방선거 후 워마드와 같은 전투적 페미니스트들은 촛불다중연대로부터 이탈하였다.

그러나 더 큰 균열은 경제를 둘러싸고 발생하였다. 역시 ‘문제는 경제야!’는 미국뿐만 아니라 한국에서도 ‘진리’였다. 문재인 정부의 소득주도성장 정책이 자영업자들의 폐업과 청년실업을 더욱 악화시키는, 의도하지 않은 결과를 낳으면서 핵심 지지층이었던 2030 청년실업자들과 도시 자영업자들이 다중연대를 떠났다. 최근에는 일부 수도권 자치단체장들이 토건국가적인 공약을 남발하여 서울과 수도권 부동산에 불을 붙이면서 집값폭등을 걱정하는 4050세대를 화나게 하였다. 촛불다중연대를 구성하였던 주요축들이 무너지면서 문재인 대통령의 지지율은 지방선거 이전 70% 중반에서 현재 50% 중반으로 20%나 내려앉았다.

문재인 정부를 탄생시키고 지탱해온 다중연대는 왜 정점의 순간에서 내리막길을 걷고 있는가? 다중연대는 정체성이 다른 이질적 집단이기 때문이다. 이들은 전통적인 계급, 시민, 민중과는 달리 탈권위, 탈집중, 저항성을 특징으로 하고 있다. 다중은 차이는 존중하지만 차별은 배격할 뿐 아니라 저항한다. 다중은 대의민주주의의 시민들과는 달리 대표를 통하지 않고 온·오프라인을 통해 직접 참여한다. 다중은 대표들이 만든 정책의 일방적인 소비를 거부한다. 다중은 정책을 소비하면서 동시에 생산·공급하는 프로슈머(prosumer)다. 다중은 정치적인 평등을 넘어서 사회적으로 평등한 권리, 경제적 이익, 정보, 그리고 여가의 사회적 소유를 주창한다.

문재인 정부는 이질적인 다중들의 다양한 요구를 맞춤형으로 수용하고 실현하는 데 실패함으로써 다중연대를 구성하고 있는 집단들의 분리주의적 이탈을 초래하고 있다. 저항의 정치가 일상화되어 있는 탈근대적 다중들에게 근대 시민으로서의 권리와 의무를 다하면서 정부의 정책을 수동적으로 소비해줄 것을 호소하는 것은 너무나 ‘근대적’인 정치문법이다.

문재인 정부는 정책의 소비자이자 생산 공급자로 변모한 다중들의 요구를 능동적으로 실현해주어야 다중의 지지기반이 와해되는 것을 막을 수 있다. 여성차별의 철폐, 임금차별, 빈부와 신분의 양극화 해소, 갑을관계 등과 같은 사회적 차별과 특권을 철폐해 달라는 이질적 다중들의 요구들에 대해 공정한 사법적 정의를 실현할 기회를 제공하는 대의민주주의적 대응을 하는 것은 다중들의 불만을 키울 뿐이다.

다중은 기회의 평등을 넘어서 결과의 평등을 선호한다. 미투 가해자를 처벌하고, 일자리를 만들어주며, 구입 가능한 주택을 제공해주고, 교육양극화를 시정하며, 갑을관계를 철폐하는 등 가시적인 정책결과물을 생산해내야 한다. 그래야 ‘집 나간 다중들’이 다시 돌아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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