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남의 혁신 ‘농민수당’

2018.09.13 20:54 입력 2018.09.13 21:03 수정

“이렇게 계속 갈 수 있을까?” 지구온난화와 기후변화로 지난여름의 폭염이 앞으로 더욱 심해질 것이라는 우울한 예측을 보며 들었던 물음이다. 우울하게 만드는 건 기후만이 아니다. 소득불균형, 실업과 취업난, 집값 폭등, 고령화와 빈곤노인층, 저출산과 인구절벽 등 각종 통계로 드러나는 현실은 보기만 해도 숨이 막힌다. 역설적이게도, 오늘의 현실은 우리가 열심히 살아온 결과다. 그러니 지금의 방식으로 더욱 열심히 일하는 것은 상태를 악화시킬 뿐이다. 해법은 지금과 전혀 다른 길에서 찾아야 한다. 암울한 전망 속에서도 우리가 기존의 길을 고집하는 것은 새롭게 길을 그릴 상상력이 없어서 그럴지 모른다. 현재의 방식이 선택의 전부라고 철저히 학습되었는지도 모른다.

[녹색세상]해남의 혁신 ‘농민수당’

혁신이 절실하다. 혁신은 ‘피(皮)’를 ‘혁(革)’으로 바꾸는, 근원적이고 전면적인 변화다. 하지만 우리의 혁신은 외관의 치장에 동원되기 일쑤다. 그래서 혁신이 차고 넘쳐도 우리의 현실은 요지부동이다. 문재인 정부의 ‘혁신성장’은 규제혁신과 투자증진을 통한 성장확대가 골자다. 기업의 투자증진을 위한 규제혁신은 결국 규제완화를 뜻하니, 혁신성장이 이명박 정부의 ‘비즈니스 프렌들리’ 정책을 통한 성장과 무엇이 얼마나 다른지 모르겠다. 정부는 의료기기, 은산분리, 개인정보의 규제완화를 추진하고, 더불어민주당은 박근혜 정부의 ‘규제프리존특별법’과 비슷한 ‘지역특구법’ 제정을 서두른다. 모두 지금까지 걸어왔던 길을 부지런히 걸어간다. 급한 건 이해하지만, 그렇게 해서는 새로운 길로 갈 수 없다.

급할수록 돌아가라 했다. 먼저 문제의 뿌리로 되돌아가 거기서 다시 길을 찾아야 한다. ‘거기’는 어딜까? 지난 11일 청와대 앞에서 농민들이 “밥 한 공기 300원”이라는 구호를 외쳤다. 밥 10공기 분량에 해당하는 쌀 1㎏당 최소 3000원의 가격 보장과 수확기 쌀 대책 수립을 촉구한 것이다. 그 전날에는 ‘국민의 먹거리 위기, 농정 적폐 청산과 대개혁을 염원하는 시민농성단’이 청와대 인근에서 무기 단식농성에 들어갔다. 우리 농촌이 신음하고 비명을 질러온 지 오래다. 정부가, 우리가 무시했을 뿐이다. 박근혜 정부의 쌀값 약속을 지키라고 상경한 농민들을 기다린 건 물대포였고, 백남기 농민이 희생되었다. 이제 농민들이 다시 비명을 질렀고, 시민들이 거리에 나섰다.

사람의 문제는 결국 ‘먹고사는’ 문제다. 그리고 먹을거리는 도시의 사무실이나 공장이 아니라 농촌의 논과 밭에서 나온다. 농촌이 사람 사는 모든 곳의 뿌리다. 우리는 그동안 너무나 당연한 이 사실을 외면해왔다. 그런 농촌이 무너지니, 도시가 무사할 리 없다. 지금 도시에는 사람이 너무 많아서, 농촌에는 사람이 너무 없어서 문제다. 도시에선 할 일과 살 곳을 구하지 못해서 아우성이고, 농촌엔 일할 사람이 모자라고 빈집이 늘어간다. 도시의 삶이 갈수록 황폐해지면서 농촌에 살려는 사람도 꽤 많이 있지만, 실제로 가는 사람은 별로 없다. 지금의 농촌 현실에서는 살아남을 전망이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도시로만 몰렸던 젊은이들이 왁자지껄 농촌으로 돌아가는 광경, 젊은이와 아이들로 북적되는 농촌 마을을 상상해보자. 우리나라 전체의 혁신은 바로 여기에서 시작될 것이다. 이 상상을 현실로 바꾸는 데 필요한 여건을 만드는 것은 혁신을 하겠다는 정부의 가장 중요하고 시급한 과제다.

혁신의 소식은 전라남도 해남에서 들려왔다. 지난 8월 말, 해남군은 전체 농가에 연 60만원의 농민수당을 지급한다고 밝혔다. 전국 최초다. 적은 액수지만, 농민수당은 무너지는 농촌 현실과 공익적 가치를 비롯한 농업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농촌을 살리겠다는 정책적 결단이다. 중앙정부가 할 일, 갈 길을 해남군이 먼저 보여주었다. 이제는 이 혁신의 불꽃이 활활 타오르도록 정부가 성심껏 전력을 다해 응답할 차례다. 농촌의 성장이야말로 ‘혁신’성장이다.

추천기사

바로가기 링크 설명

화제의 추천 정보

    오늘의 인기 정보

      추천 이슈

      이 시각 포토 정보

      내 뉴스플리에 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