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교육열의 근원

2018.11.14 20:35 입력 2018.11.14 20:48 수정

서당은 조선의 특별한 사회현상이었다. 특히 18세기 이후가 되면 서당교육이 활기를 띠었다. 양반들은 물론이고 살림이 조금 유족한 평민들도 서당을 세웠다. 결과적으로 조선 팔도 어디에나 서당이 빽빽이 들어찼다.

덕분에 19세기 조선은 문자해독률이 높았다. 유교 지식도 지배층의 전유물이 아니었다. 그때 서당에서 어떤 이들은 유교를 넘어선 새 세상을 꿈꾸었다. 1894년 동학농민운동을 이끈 전봉준과 김개남도 훈장 출신이었다.

[역사와 현실]한국 교육열의 근원

1910년 조선이 망하자 일제의 탄압으로 서당의 입지가 줄었다. 하건만 1920년대 말까지도 많은 서당이 살아 있었다. 1927년 충북 청주의 예를 들어보자. 모두 355개의 마을이 있었는데 서당이 202개나 되었다. 마을의 6할 정도가 서당을 운영했다!

시설 면에서 서당은 단출한 편이었다. 초가집에 방 2칸이 많았다. 한 칸은 훈장이 사용했고, 나머지 한 칸은 강의실이었다.

물론 규모도 번듯하고 장서도 넉넉한 서당도 상당수였다. 대구의 농연서당이 그랬다. 1766년(영조 42), 이상정은 <농연서당기>에서 농연서당의 유래 및 현황을 기술했다. 17세기 중반에 창립된 이 서당은 중간에 퇴락하였다. 1754년(영조 30) 백불암 최흥원이 다시 일으켰다. 3칸 건물이었다. 동쪽 2칸은 공부하는 방이요, 서쪽 1칸은 대청이었다. 뒤편에는 따로 별실을 두었다. 또 앞쪽에는 연못을 만들어 연꽃도 심었고, 화단도 꾸몄다. 국화, 매화, 대나무, 모란, 해당화 등이 철마다 피었다.

18세기 후반에는 서당 건설이 새로운 유행이었다. 경상도, 충청도, 전라도와 경기도에서 그 열기가 대단하였다.

서당이라면 우리는 기껏해야 한문의 초보적인 문리(文理)를 가르치는 곳쯤으로 속단한다. 알고 보면 서당의 수준은 천차만별이었다. 과거시험을 준비하는 곳이 대부분이었다. 그러나 농연서당처럼 성리철학의 심오한 이치를 탐구하는 서당도 많았다. 이름은 한결같이 서당이라 했으나, 그 지향점과 시설 등에는 차이가 컸다.

당쟁의 전초기지 역할을 한 서당까지도 존재했다. 홍여하가 세운 산양서당과 박세채의 남계서당이 그에 해당했다. 당파싸움이 치열해지자 각 당파는 연고지에 정치적 발판을 구축하려 노력했다.

홍여하의 문집 <목재집>에서 나는, 그가 문경의 서당 유생들을 대신해 쓴 글을 발견했다. ‘산양서당에 사당을 세우면서 관청에 보낸 글’이다. 요점은 서당에 부속된 사당을 건립하는데 필요한 노동력을 관청이 제공하길 바란다는 거다. 이런 청원서를 관가에 보낼 정도로 산양서당의 정치적 입김은 거셌다.

서당에는 사당의 기능이 없었다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다. 잘못된 견해일 것이다. 산양서당처럼 서원이나 별 차이가 없는 서당도 여럿이었다. 이 서당은 훗날 근암서원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요컨대 19세기 조선에는 마을마다 서당이 있어 청소년들의 꿈을 키웠다. 그때 서구 근대국가들은 국력을 쏟아 경쟁적으로 의무교육을 시행하였다. 인류 역사상 최초로 국민교육 시대가 열린 것이었다. 조선의 지도자들은 그러한 외부사정을 전혀 알지 못했다. 설사 알았다 한들 그들로서는 의무교육 같은 걸 시행할 엄두도 못 냈을 것이다. 조선의 국가 재정은 상상할 수 없이 빈약했다.

불행 중 다행이라면 조선에는 민간 주도의 서당교육이 크게 발전했다는 점이다. 대다수 평민까지도 남성들은 최소한의 교육 기회를 얻었다. 조선의 교육 여건은 동시대의 중국 및 일본에 견주어도 결코 손색이 없었다. 만약 18세기 후반으로 거슬러 올라간다면, 조선의 서당교육은 유럽의 마을 학교들보다 오히려 나았을지도 모른다.

많은 서당이 있었기에, 조선은 수준 높은 성리학 문화를 향유했다. 당시 유행한 다양한 고소설들도 충, 효, 열로 집약되는 유교적 가치를 표방했다. 심지어 각 지방에서 구전으로 전수된 서사무가까지도 유교 도덕을 내면화한 경우가 많았다.

일제 강점기 후반이 되자 서당은 사실상 없어졌다. 그러나 해방이 되자 서당 시절의 교육열이 되살아났다. 한국의 과열된 교육 열기는 세상을 놀라게 했다. 지역과 계층을 초월해, 한국인은 자녀교육에 가족의 운명을 건 사람들처럼 보였다. 좋게 말해, 이 교육열이 고도산업화와 민주화를 이끌었다.

그러나 동전에는 양면이 있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새로운 처방이 등장하지만, 이 나라의 입시지옥은 계속되었다. 나는 그 뿌리가 서당의 역사에 있다고 본다. 우리 조상들이 과거시험에 모든 것을 걸었던 것처럼 오늘날 우리는 입학시험과 취직시험에 인생을 건다.

젊은 시절 나는 유럽에서 십여 년 동안 살았다. 그 사회에는 영어, 수학을 가르치는 입시학원도 없고, 경쟁률이 수십, 수백 대 일인 공무원시험과 대기업 입사시험도 없었다. 그래도 큰 문제 없이 사회가 돌아갔다. 교사인 아버지가 자녀의 성적을 올리려고 시험지를 몰래 훔치는 행위 따위는 상상 자체가 불가능하다.

역사적 유산은 복합적이다. 자칫하면 전통의 함정에 빠질 수가 있다. 잘라낼 것은 과감히 없애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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