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전 앞’ 야구장

2019.03.25 20:24 입력 2019.03.25 20:26 수정

어떤 이름들은 추억과 결부돼 있다. 미국 프로야구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의 홈구장 이름이 AT&T 파크에서 오라클 파크로 바뀌었다는 기사를 읽고 얼마간 섭섭했던 것도 그 때문이었다.

AT&T 파크는 직접 가 본 첫 메이저리그 야구장이었다. 그날 샌프란시스코 선발투수는 지금은 은퇴한 맷 케인이었고 상대팀 LA 다저스의 선발은 류현진이었다. 우리 일행은 AT&T 파크 간판을 배경으로 기념사진을 찍었고, 공 하나에 일희일비하며 경기를 관람했다. 경기가 끝난 후엔 도시의 서늘하고 축축한 공기를 마시며 30여분을 걸어 숙소로 돌아왔다. AT&T 파크는 우리 일행에게 잊지 못할 기억을 선사했다.

[기자칼럼]‘역전 앞’ 야구장

이방인인 나조차 서운한 마음이 들었으니 샌프란시스코 열혈 팬들이 느끼는 아쉬움은 얼마나 컸을까. 샌프란시스코 구단이 통신업체 AT&T에 구장 명명권을 판매한 것이 2006년이었다.

지난해까지 13시즌 동안 샌프란시스코는 세 차례 월드시리즈 우승을 차지했다. 배리 본즈가 통산 756호 홈런을 치고 메이저리그 통산 최다 홈런 기록을 31년 만에 갈아치운 곳도 2007년의 AT&T 파크였다.

지난 1월 샌프란시스코는 소프트웨어 업체 오라클에 20년간 구장 명명권을 양도하는 내용의 계약을 체결했다고 발표했다. 향후 20년 동안 샌프란시스코 선수들은 이곳에서 수많은 기록과 명장면을 생산할 것이고, 팬들은 저마다 소중하고 즐거운 추억을 새롭게 쌓아갈 것이다. 그럼에도 AT&T 파크라는 이름이 팬들에게 불러일으킬 기억의 무게는 결코 가볍지 않을 것이다.

야구장 하나가 문을 열고 닫을 때마다 기대와 아쉬움이 공존하는 것은 한국도 마찬가지다. 2007년 폐장된 동대문야구장이 대표적이다. 이 야구장은 1982년 프로야구 역대 첫 개막 경기가 열렸던 곳이고 프로야구 출범 전에는 고교 야구의 메카였던 곳이다. 그 시절 이곳과 관련된 경험이 있는 이들에게 동대문야구장이라는 이름은 기억과 감정을 자극하는 특별한 힘을 갖는다. 2013년까지 프로야구 KIA의 홈구장이었던 광주 무등구장, 지난해부터 ‘이승엽 야구장’으로 불리는 대구 시민운동장 야구장도 그렇다.

이런 관점에서 보자면 최근 개장한 ‘창원NC파크 마산구장’의 명칭 논란은 안타깝다. 야구장을 뜻하는 영어 ‘파크’ 뒤에 또 ‘구장’이 붙은, ‘역전 앞’처럼 문법적으로도 어색한 이름이 정치인들의 밥그릇 싸움부터 떠올리게 만들어서다.

창원시는 새 구장 명칭을 둘러싼 이견을 조율하고자 명칭선정위원회를 발족해 ‘창원NC파크’로 최종 결론을 도출했다. 하지만 창원시의회는 명칭을 ‘창원NC파크 마산구장’으로 변경한 조례 개정안을 처리하며 위원회 논의 결과를 헌신짝처럼 폐기했다.

마산은 2010년 창원에 통합돼 창원시 2개구의 이름에만 그 흔적이 남아 있다. NC의 과거 홈구장인 마산구장이 사라진 것도 아니다. 그런데도 구 마산지역 정치인들이 새 구장 명칭에 ‘마산구장’을 넣어야 한다고 고집하는 것은 마산의 이름을 야구장 간판에 박제하고 이를 의정활동보고서에 한 줄 넣어야 구 마산지역 유권자들의 향수와 감정을 자극하고 표심을 잡는 데 유리하기 때문일 것이다. 새 구장의 이름은 정치인들이 너도나도 숟가락을 얹기 위해 언성을 높이고 핏대를 세우는 투쟁의 장이 돼 버렸다.

창원이 야구장 이름을 두고 골머리를 앓는 사이 대전의 신축 야구장 부지가 결정됐다는 소식이 발표됐다. 대전 역시 부지가 결정되기까지 만만찮은 과정을 겪었다. 구의회 의원들이 야구장 유치를 위해 삭발했고, 구청장 비서실장이 단식투쟁을 벌였다. 이 야구장은 새로운 간판을 달고 첫 경기를 치르기까지 어떤 기억을 대전시민들에게 남기게 될까. 창원의 선례가 되풀이되지 않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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