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파와 좌파의 시대

2019.06.17 20:48 입력 2019.06.17 20:49 수정

[전우용의 우리시대]우파와 좌파의 시대

정치세력을 좌파와 우파로 나누는 관행은 1789년 프랑스 혁명 때 생겼다. 혁명 과정에서 소집된 국민의회는 의장석을 중심으로 오른쪽에 왕당파, 왼쪽에 공화파의 자리를 배치했다. 공화파가 왕당파를 타도한 뒤 구성한 1792년의 국민공회에서는 오른쪽에 온건 개혁세력인 지롱드가, 왼쪽에 급진 개혁세력인 자코뱅이 앉았다. 이후 우파는 대체로 온건한 개혁세력, 좌파는 급진적인 개혁세력을 지칭하는 말로 통용되었다. 물론 루이 16세가 단두대에서 목숨을 잃은 뒤에도 왕당파가 완전히 소멸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이들은 그저 시대착오적 구세력일 뿐, 우파도 좌파도 아니었다.

[전우용의 우리시대]우파와 좌파의 시대

시민혁명 시대에 뒤이어 계급혁명 시대가 도래했다.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사회문제의 근본적 해결을 주창하며 좌파를 자처(自處)했다. 하지만 공산주의자 내부에도 좌파와 우파가 있으며, 부르주아 진영도 좌파와 우파로 갈린다고 보았다. 좌파와 우파는 이념이나 계급이 아니라 태도와 관련된 개념이었다.

우리나라에서 우파니 좌파니 하는 용어가 사용되기 시작한 것은 3·1운동 이후 사회주의 사상이 전래되면서부터였다. 하지만 1920년대 초반의 식민지 상황이 대혁명 당시의 프랑스와 비슷한 면이 있었기 때문인지, 우파와 좌파도 프랑스 혁명 당시와 비슷한 개념으로 사용되었다. 1925년 ‘시대일보’는 시골의 한 작은 학교에서 일어난 내분을 보도하면서 이렇게 기술했다. “육영의숙을 옛날식 한문서당으로 고치자는 사람들의 주장과 완전한 학교 제도로 변경하자는 주장으로 좌우파가 갈렸다.” 복고주의자 또는 중세 회귀주의자를 우파, 진보주의자 또는 근대주의자를 좌파로 분류한 것이다.

우파와 좌파라는 용어가 정치적 개념어로 정착한 것은 1920년대 중반 ‘민족단일당’ 결성 운동 과정에서였다. 1920년대 초반에 사회주의 사상을 수용한 사람들 대다수는 계급혁명만이 모든 사회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방도라고 생각했다. 그들은 조선물산장려운동, 민립대학 설립운동 등 ‘민족’을 중심에 두고 진행되는 사회운동들을 ‘계급 모순을 은폐, 호도하는 부르주아 운동’이라고 배격했다. 그러나 제국주의 타도를 선차적 과제로 삼은 국제 공산주의 운동의 조류 변화에 따라 그들도 민족운동 진영 중에서 협력할 부류와 배척할 부류를 나누기 시작했다.

3·1운동 이후 민족주의자 일부는 ‘인류통성과 시대양심’에 대한 기대를 접고 사회진화론의 세계관으로 되돌아갔다. 그들은 자치 능력과 경제력 등을 키우는 것이 독립의 전제이며, 실력을 키우기 위해서는 조직적 훈련이 필요하고, 조직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일본을 적대하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런 부류는 타협파, 개량주의자, 우파 등으로 불렸다. 반면 독립 우선 노선을 포기하지 않은 부류도 있었다. 이들은 일본 제국주의의 감시와 통제하에서 독립할 실력을 기른다는 것은 허망한 꿈에 불과하다고 생각했다. 이런 부류가 비타협파, 좌파로 불렸다. 민족주의자를 자처했던 사람들도 이런 호칭을 거부하지 않았다.

1927년 민족단일당으로 신간회가 결성되었다. 이 단체는 민족주의 우파를 기회주의로 규정하고, 그를 일체 배격한다고 천명했다. 이후 민족주의를 좌파와 우파로 나누는 것은 사회적 통념처럼 되었다. 사회주의자들은 흔히 ‘좌익’으로 불렸다. 물론 이들 외에 ‘친일파’로 불린 집단도 있었다. 중일전쟁 이후 ‘내선일체’를 내세운 일제의 민족말살정책이 본격화하는 가운데, 민족주의 우파는 자기 논리의 모순을 극복하지 못하고 친일파에 수렴해갔다. 사회주의자와 민족주의 좌파 중에서도 일제의 압력을 견디지 못하고 투항하는 사람이 속출했다.

일제가 패망하자, 정치세력으로서 친일파는 존재할 이유가 없게 되었다. 하지만 민족개량주의와 친일의 논리는 사라지지 않았고, 친일파 개개인도 정치무대에서 물러나지 않았다. 내적으로는 민족국가 건설 방략을 둘러싼 치열한 논란 과정에서, 외부적으로는 냉전체제의 형성 과정과 관련을 맺으면서, 정치 지형은 급속히 재편되었고 각 정치세력의 이름도 달라졌다. 일제강점 말기 한인들에게 이름, 언어, 역사 등 민족의 표지를 다 버리고 철저한 일본인이 되라고 요구했던 정치세력이 ‘애국’을 명분으로 삼아 정치무대에 뛰어드는 기이한 현상이 벌어졌다. 모스크바 3상회의 결정이 알려진 뒤, 그 결정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비상국민회의로 결집했고, 찬성하는 사람들은 민주주의민족전선으로 모였다. 이때부터 전자를 우익, 후자를 좌익으로 분류하는 관행이 자리 잡았다. 사회주의자가 아니라도 좌익이 되었고, 친일파라도 우익으로 불렸다.

단독정부 수립과 6·25전쟁을 거치면서, 한국에서는 좌익이건 좌파건 공식적으로는 존재할 수 없는 정치세력이 되었다. ‘좌(左)’라는 낙인이 찍히는 것은 언제 잡혀가 고문당하고 죽어도 할 말이 없게 된다는 것을 의미했다. 이런 상황에서 역대 독재정권은 ‘좌경 용공세력’ 등의 신조어를 만들어 비판세력을 탄압했다.

2002년, 당시 야당이던 한나라당 대표가 대한민국 정권을 ‘좌파적인 정권’으로 규정하여 한바탕 논란이 일었다. 논란이 확대되자 발언의 주역은 “좌파적인 정권이라고 했지 좌파정권이라고 하지는 않았다”며 한발 물러났지만, 언론은 이윽고 ‘좌파정권’이라는 말을 관용어로 만들었다. 이는 6·25전쟁 이후 한국인들 의식 깊은 곳에 자리 잡은 ‘좌(左)’라는 글자에 대한 적대감을 동원하려는 ‘언어전술’이었다. 프랑스 국민공회의 예에서 보듯, 공화국에서 우파와 좌파는 개혁 속도와 방법론의 차이에 따라 구분된다. 반개혁 세력은 반개혁 세력일 뿐, 우파도 좌파도 아니다. 대한민국에 과연 ‘좌파정권’이 들어선 적이 있는가? 지금 우파라 불리는 세력은 과연 우파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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