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의 시대

2019.12.02 20:33 입력 2019.12.02 20:35 수정

[전우용의 우리 시대]대학의 시대

“대학(大學)의 도는 밝은 덕을 밝히고 백성을 가까이하며 지극한 선(善)에 이르는 데에 있다.” 유교에서 ‘대학’은 문자 그대로 큰 학문, 즉 천하를 다스리는 학문으로서 치자(治者)의 학이었다. 미래의 치자인 귀족 자제들을 모아 가르치는 교육기관의 역사는 매우 길다. 우리의 경우 고구려 때 ‘치자의 학’을 가르친 기관의 이름도 태학(太學)이었다. 하지만 고구려의 태학이나 신라의 국학 등에서 현대 대학이 기원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현대의 대학(university) 제도는 12세기 프랑스와 이탈리아에서 결성된 ‘학자들의 동업조합’에서 기원한다.

[전우용의 우리 시대]대학의 시대

학문은 인간이 자신을 성찰하고, 자신이 속한 세계의 총체 및 그 구성 요소들의 본질과 운동 원리를 이해하며, 자신과 세계 사이의 관계를 끊임없이 재설정하는 실천 활동이다.

학문하는 인간 역시 인종, 민족, 국가, 종교, 젠더, 계층, 직업 등의 여러 범주가 중층적·복합적으로 얽힌 관계망 위에 존재하는 구체적인 인간이다. 다만 학자는 그 관계망의 정당성을 회의하고 변화 가능성을 탐색하기 때문에 각각의 범주들과 팽팽한 긴장 관계를 맺는다. 학자는 상식과 통념을 의심하기에, 자기 시대와 불화(不和)한다. 유럽의 대학은 학문과 속세는 분리되어야 한다는 인식에서 출발했다.

하지만 속세와 소통하지 않고서는 대학의 생존이 불가능했다. 대학은 결국 근대 국민국가가 형성되는 과정에서 국가기관의 일종, 또는 국가기관의 감독을 받는 기구로 편제됐다. 대학을 정점으로 하는 교육체계는 근대 국민국가를 직조하는 씨줄의 하나였다. 학문 공동체는 국가의 관점에 따라 국가의 이익을 위해 복무하는 역할을 부여받았다. 제국주의 시대 유럽의 학자들은 세계 도처를 다니며 제국의 척후(斥候) 구실을 했다. 그들은 전 세계의 지식을 수집하여 자국에 축적하고, 그를 학문의 자료로 삼았다. 이렇게 구축된 학문체계는 다시 유럽 국가들이 전 세계에 대한 지배력을 확장할 수 있게 해 주었다. 20세기 사회주의 체제를 구축한 국가들은, 공공연하게 혁명에 복무하는 학문을 요구했다. 학자들은 예정된 미래로 가는 지름길을 발견하거나 개척하는 임무를 맡았다.

유교 문화권 사람들은 ‘학자들의 동업조합’을 대학으로 번역했다. 그들에게 학문은 ‘치자의 소양’과 같은 뜻이었기 때문이다.

한국인들이 유럽식 대학제도의 구체적 정보를 얻은 것은 1881년 조사시찰단 파견 이후의 일이었다. 시찰단의 일원이었던 이헌영은 일본에는 법학부, 이학부, 문학부, 의학부로 구성된 도쿄대학교를 비롯해 8개의 대학이 있다고 보고했다. 이후 대학 설립은 조선 정부의 주요 과제가 되었다. 1886년 육영공원 설치가 그 첫걸음이었다. 왕은 이 학교에 대해 “언어, 문자뿐만 아니라 농상(農桑), 의학(醫學), 공기(工技), 상무(商務), 이용(利用), 후생(厚生) 등 각 방면의 기술 분야를 두루 설치하여 제각기 체계를 갖추도록 명”했고, 미국인 교사들은 이 학교를 왕립대학(Royal University)이라고 불렀다.

조선 정부가 대학 설립을 구체적으로 전망한 것은 1895년 ‘교육입국조서’ 발표 이후였다. 이 해에 여러 개의 소학교가 설립되었고, 졸업생이 배출된 1900년에는 관립중학교가 개교했다. 애초 계획대로라면 1904년에 대학교가 문을 열어야 했으나, 러일전쟁 와중이어서 불가능했다. 대한제국 정부는 정규 학제와 별도로 법관양성소(1895)와 의학교(1899) 등을 설립하여 대학으로 발전시킬 계획도 세웠다. 선교사들도 자기들이 세운 학교를 대학으로 발전시키려고 했다.

그러나 한국을 강점한 일제는 ‘조선인에게는 고등교육이 필요 없다’는 태도를 견지했다. 그들은 식민지 원주민들에게는 치자는 물론 학자의 자격도 필요 없다고 판단했다. 그들은 근대 과학이 식민지 원주민의 손에 잘 닿지 않는 곳에 있을 때 신비로움을 유지할 수 있다는 점을 잘 알았다. 식민지를 비(非)문명 또는 반(反)분명 상태에 묶어 두는 것은 정치적으로나 이데올로기적으로나 유익했다. 같은 맥락에서 한국인들은 대학을 세워 치자와 학자를 양성하는 것이 독립의 지름길이라고 생각했다.

1924년, 일제는 이른바 ‘문화통치’의 일환으로 경성제국대학을 설립했다. 대학 교육에 대한 원주민들의 열망을 일부 수용함으로써 식민통치를 안정화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조선인 학생 비율은 3분의 1 이내로 제한되었고, 조선인 교수는 단 한 명도 채용하지 않았다. 물론 조선인도 일본이나 외국 대학에 진학할 수는 있었으나, 그 수는 극히 적었다. 이런 상황에서 대학생, 또는 대학 졸업자는 바로 ‘특권층’이 되었다.

해방은 대학 교육에 대한 욕망도 해방시켰다. 미군정은 식민지하의 관립 전문학교들을 경성제국대학에 통합하여 하나의 국립 대학교를 만드는 한편, 여러 사립 전문학교들을 대학으로 승격시켰다.

그 뒤 70년, 이제 한국은 세계에서 대학 진학률이 가장 높은 나라가 되었다. 10대 청소년들의 삶은 대학 입시에 철저히 종속되어 있으며, 부모들은 대학 입시제도가 사회의 형평성과 공정성 문제를 압축적으로 보여준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지금 대학의 존재 이유에 대한 사회적 고민은 사라졌다. 이제 대학 졸업장은 어떤 특권도 보장하지 않는다. 신분 이동의 사다리 구실을 못한 지도 오래다. 자본의 일방적 지배를 받는 학문에 대해 성찰하는 목소리도 사라졌다. 대학 진학에 대한 욕망이 역사적 형성물이었던 것처럼, 대학 생활을 ‘인생의 시간 낭비’로 보는 생각이 자리 잡는 것도 시간문제일 수 있다.

국가, 자본, 시민사회, 개인 모두가 자문(自問)해야 한다. 대학은 왜 필요한가? 대학을 개혁하지 않고 입시제도만 개혁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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