착한 사람의 시대

2019.12.30 21:06

[전우용의 우리 시대]착한 사람의 시대

‘착하다’는 무슨 뜻일까? 국어사전은 ‘언행이나 마음씨가 곱고 바르며 상냥하다’라고 정의하지만, 이것만으로 완벽한가? 고운 말 쓰고 법과 규범을 잘 지키며 살면 착하게 사는 것일까? 아니, 그 전에 왜 착하게 살아야 하는가?

[전우용의 우리 시대]착한 사람의 시대

“범과 곰이 한 동굴에서 살았는데, 늘 환웅에게 사람 되기를 빌었다. 환웅이 쑥 한 줌과 마늘 스무 개를 주면서 ‘너희들이 이것을 먹고 백일 동안 햇빛을 보지 않으면 곧 사람이 될 것이다’라고 말했다. 곰은 이 말을 잘 지켜 사람의 몸을 얻었으나 범은 그러지 못했다. 웅녀(熊女)는 날마다 단수(壇樹) 아래에서 아기 배기를 축원했다. 환웅이 잠시 변하여 그와 혼인했더니 이내 잉태하여 아들을 낳았다. 그 아기의 이름을 단군왕검(檀君王儉)이라 했다.”(<삼국유사> 기이편)

근대의 민족 기원 담론에 따르면, 한민족의 공동 시조는 단군이다. 개천절 노래도 “이 나라 한아바님은 단군”이라고 거듭 강조한다. 부계 ‘혈통’만 따져 왔음에도, 단군의 아버지 환웅과 할아버지 환인을 조상에서 배제한 까닭은 무엇일까? 그들은 사람이 아니라 신(神)이기 때문이다. 신과 동물이 결합해서 나은 아기가 바로 ‘사람의 조상’이었다.

사람을 신과 동물의 중간에 위치한 존재로 보는 것은 고대인들에게 보편적이었다. 인류는 신을 믿음으로써, 자기가 신과 닮은 모습으로 창조되었거나 신성(神性)을 지닌 특별한 존재라는 확신을 갖고 자연을 대할 수 있었다. 인류에게 신은 자신과 다른 동물들 사이의 거리를 측정할 수 있게 해주는 자(척·尺)였다. 인류를 자연의 일부이면서 자연에 대립하고 나아가 자연을 지배하려 드는 특별한 존재로 만들어준 것은 자기 머리 위에는 신이 있고 발아래에는 다른 동물들이 있다는 생각이었다. 그들은 자기 몸이 다른 동물들의 몸과 마찬가지로 늙고 병들고 죽고 썩는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러나 자기 마음은 가꾸는 만큼 고양되어 신과 합일될 수 있을 것으로 믿었다. 인간의 마음이 신과 합일되는 것이 구원이었고, 동물 수준으로 떨어지는 것이 타락이었다.

자기 배를 채우기 위해 남의 생명을 해치려는 욕망은 동물과 공유하는 것이었고, 자기를 희생해서라도 남을 살리려는 의지는 동물에게서 볼 수 없는 것이었다. 고대인들이 보기에, 동물성의 반대편에 있는 것이 신성이었다. 신에게서 기원한 것이 선(善)이요, 동물과 공유하는 것이 악(惡)이었다. 인간은 늘 선악의 갈림길에서 방황하고 고민하면서도 대체로는 신의 뜻대로 살아야 한다고들 생각했다. 그래야 죽은 뒤에 신의 곁에서 영생할 수 있다고 믿었으니까.

흔히 선량(善良)을 묶어 쓰지만, 선심은 베푼다고 하고 양심은 지킨다고 한다. 양심은 선과 악이 공존하는 인간의 마음이지만, 선심은 적극적으로 지고지선(至高至善)한 신의 의지를 구현하려는 마음이다. 악을 미워하고 불의를 용납하지 않으며 남의 불행을 보고만 있지 않아야 ‘선’이다.

16세기 과학혁명은 신의 존재에 대한 일반적 믿음에 만회하기 어려운 타격을 주었다. 인간은 신의 섭리라고 믿었던 수많은 현상이 권선징악(勸善懲惡)이라는 신의 고귀한 의지와 관계없는 자연법칙에 지배된다는 사실을 알았다. 당장 신의 거소(居所)였던 ‘하늘’이 사라졌다. 18세기에 괴테는 코페르니쿠스의 발견으로 인해 인류가 직면한 정신적 위기 상황을 이렇게 정리했다. “낙원으로의 복귀, 종교적 믿음에 대한 확신, 거룩함, 죄 없는 세상, 이런 것들이 모두 일장춘몽으로 끝날 위기에 놓였다.” 자기들만이 신성과 영혼(靈魂)을 가진 특별한 존재라고 믿었던 자부심은 무너지기 시작했고, ‘인간도 동물의 일종일 뿐’이라는 생각이 급속히 확산했다. 19세기 진화론은 그런 생각을 과학의 명제로 만들었다.

과학은 수천 년, 혹은 수만 년간 요지부동이었던 신의 자리를 흔들었고, 결국 그 자리를 빼앗았다. 인간은 자기 생각과 행동에서 신의 의지를 찾는 대신에 ‘과학적 합리성’을 찾았다. “반찬 가리면 복 달아나”라던 밥상머리 경구는 “편식하면 키 안 자라”로 바뀌었고, 밤은 귀신이 아니라 사람이 무서운 시간대가 되었다.

국가도 신의 의지가 아니라 사람들의 의지가 모여 만들어진 기구가 되었다. 굶주림과 질병으로 절망에 빠진 사람들에게 은총을 베푸는 임무도 종교 시설에서 국가로 넘어왔다. 현대인들은 불행을 당하면 신이 아니라 국가를 원망하며, 신의 은총을 갈구하는 대신 국가의 지원을 요구한다. 순교성인(殉敎聖人)들이 사라진 자리를 순국선열(殉國先烈)들이 메꿨다.

20세기에 들어 신의 선한 의지를 믿지 않거나 가볍게 여긴 인간은 자기들이 어떤 존재인지를 굳이 증명하려 들었다. 세계도처에서 벌어진 대량학살과 인종청소는, 악(惡)이 평범한 인간들의 본성에 깊게 자리 잡고 있음을 보여주었다. 과거 인류가 상상했던 그 어떤 악마도, 인간 자신보다 악랄하고 잔인하지는 않았다. 이제 개체 단위로든 전체 집단으로든 인간을 끔찍한 파멸로 이끌 존재는 인간밖에 없다는 주장을 의심할 이유는 거의 없다.

‘착함’이란 인간 내면의 신성이자 신에게 의지하는 마음이었다. 그러나 지금, 특히 한국에서, 많은 종교 지도자가 사랑 대신에 증오와 혐오를 설파하고, 신의 은총을 돈으로 환산한다. 신에 대한 믿음이 남아 있다손 치더라도, 저런 사람들이 신의 의지를 대리하는 시대에, ‘착함’은 무엇에 의지해야 하는가?

“착하게 살아야 복 받는다.” 어릴 때부터 수없이 들어온 말이다. 삶은 내 몫이지만, 복을 내리고 말고는 신의 권한이었다. 하지만 신을 믿지 않는 사람들, 신도 돈으로 은총을 내린다고 믿는 사람들이 착하게 살아야 할 이유는 무엇인가? 그래서인지, 어느 사이에 “착하게 살아봤자 너만 손해다”라는 말이 더 자주 들리게 되었다. 인류는 아주 옛날부터 ‘악이 지배하는 세상’을 상상하고 그것에 ‘지옥’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착하게 살아봤자 손해만 보는 세상’이 곧 지옥이다. 우리 모두가 지옥에 떨어져 신음하는 참상을 겪지 않으려면, ‘착하게 살아야 할 이유’를 인류 안에서, 내 안에서 찾아야 할 터이다. 필사적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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