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담받기도 불안한 나라

2019.06.28 20:34 입력 2019.06.28 20:39 수정
권수영 연세대 연합신학대학원 교수·상담학

지난달 상담실 안에서 은밀하게 성추행을 일삼는 심리상담사에 대한 충격적인 보도가 나왔다. 대한민국은 이런 무자격자들이 강남 한복판에 상담소를 열고 해외에 지부를 내도 법적으로 막을 길이 없다는 보도도 이어졌다. 일전에 한 기자로부터 왜 유독 상담 분야에만 4000개가 넘는 민간자격증이 생겨나는지 질문을 받은 적이 있다. 답변은 의외로 간단하다. 상담 서비스에 대한 국민적인 수요가 급증하여 일선 학교나 기업 그리고 정부청사에서도 상담센터를 운영하지만, 놀랍게도 상담 자격을 명확하게 규정하고 관리하는 모법(母法)이 없기 때문이다. 여성가족부가 관리하는 ‘청소년 상담사’를 제외하면 성인 대상 상담사 자격은 모두 민간자격이다. 민간단체는 일정한 형식을 갖추어 한국직업능력개발원에 자격증 등록만 하면 된다.

[사유와 성찰]상담받기도 불안한 나라

상담 전문가를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만나 자문을 제공하는 사람’으로 정의한다면 대한민국은 실로 상담 전문가 천지다. 국민 모두가 때로는 법률상담도 받고, 때로는 세무상담도 받는다. 대학 입시 컨설턴트나 취업을 알선해주는 직업상담사도 모두 상담 전문가다. 이처럼 일상생활 중 외부 행정 절차에 대해 전문가 조언을 받는 일을 ‘생활상담’이라고 한다면, 내면적 위기와 스트레스 상황에서 전문적인 심리지원을 제공하는 일을 ‘심리상담’이라고 나눠볼 수 있다. 이때 심리상담은 정신건강의학 전문의로부터 받는 정신치료와는 다른 서비스다. 제대로 된 심리상담 전문가는 주로 심리학, 교육학, 아동가족학, 신학 분야 등의 대학원 석·박사 과정에서 상담을 전공하고, 주요 관련 학회에서 민간자격증을 받는다.

국내 현행 법률들을 살펴보면, 반드시 상담지원을 제공하라는 조문이 있는 법률이 무려 30개가 넘는다. ‘발달장애인 권리보장 및 지원에 관한 법률’ 제31조에 보면 ‘보호자에 대한 상담지원’이 포함되어 있고, ‘남녀고용평등과 일·가정 양립지원에 관한 법률’ 제23조에도 ‘상담지원’이 있다. 여기서 상담은 분명히 정신질환의 치료가 아니다. 각종 차별과 스트레스를 경험하는 국민 누구나를 위한 전문적 지원을 의미하는 심리상담이다. 실로 많은 법률에서 심리상담을 제공하라지만, 어떤 자격을 가진 전문가가 하라는 것인지는 모호하다. 상담사법이 없는 국내 현실에서 그 피해는 고스란히 국민들이 입게 된다.

작년 한 정신건강의학과 교수가 질 낮은 상담의 폐해를 지적한 바 있다. 그는 ‘고도의 의학적인 전문성을 가지고 환자를 적시에 치료해야 하는 상황에도 과학적이지 않게 엉뚱한 상담에 의존하다 상태가 더 악화’된 사례에 대해 안타까워했다. 그가 국내 모든 상담을 ‘엉뚱한 상담’이라고 여기고 있다면 오해의 소지가 있다. 하지만 전문적인 상담에 대한 자격기준과 서비스 질 관리에 대한 법제화가 속히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이런 오해는 증폭될 수 있다. 또한 선진국처럼 전문상담사가 의료진과 함께 협업하여 국민 정신건강 증진을 위한 종합적인 통합서비스를 제공하는 일은 점점 요원해진다.

최근 나는 환경부 산하 국립환경과학원이 발주한 ‘가습기살균제보건센터 협력기관 사업’의 심리상담 연구책임자로 참여했다. 주요 민간학회에서 철저히 훈련받고 자격을 받은 전국의 상담 전문가들이 참여하여 사업을 진행했고, 다양한 심리지원 프로그램을 개발했다. 가습기살균제 피해를 입은 대상자들 중에는 정신건강의학과의 진료를 통해 약물치료를 병행하는 이들도 적지 않았다. 사업을 수행하는 중에 가장 높은 만족도를 보여주었던 프로그램은 피해를 입은 청소년들과 부모들에게 제공한 진로상담 캠프였다.

갑작스러운 신체적인 장애로 가슴이 무너진 아이들을 심리적으로 지원해 자신 안에 숨겨진 강점을 발견하고 미래를 꿈꾸도록 동기를 강화시키는 상담이 절실했다. 대학 교정에서 열린 상담 캠프에서 여러 대학생과 교수들을 직접 만나보고 숨겨진 가능성을 싹틔우는 변화를 경험했다. 이는 약물치료로 불안을 조절하는 일만큼 중요하다.

국민들은 긴급하게 상담을 받으려고 해도 누구를 찾아가야 하는지 알 수 없다. 방송에 자주 등장하는 전문가를 찾아갔다가 성추행까지 경험했다는 보도를 접하고 났으니 더 불안에 떨 수밖에 없다. 어느 국회 입법조사관은 내게 부처 간 이견을 조정하면서 상담사법을 만들려면 최소한 5년 이상 소요될 것이라 말했다. 그렇다면 굳이 모법부터 만들지 않아도 좋다. 현재 여성가족부 국가자격인 ‘청소년 상담사’를 ‘청소년/가족 상담사’로 확대할 수 있다면, 국가가 국민 전체에게 행하는 상담 서비스의 질을 높이고 관리하는 일이 어느 정도 가능하다. 지금이라도 국가가 적극 나서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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