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기적인 전문가 시대

2019.11.04 20:52 입력 2019.11.04 20:54 수정

[전우용의 우리 시대]이기적인 전문가 시대

“묵은 양반이라 함은 낭비하여 선조의 재산을 탕패(蕩敗)하고 게을러서 가업을 경영하지 못하여 나라에 대하여 유익한 국민 되지 못하고 가정에 대하여 직책을 다하는 가족 되지 못하고 아무 사업하는 것 없이 공연히 내가 양반이다 하는 묵은 생각만 품고 앉아서 예전에 문벌이 낮은 사람이 잘되어 가는 것을 보면 ‘상놈이 되지 못하게 제아무리 하면 상놈이 아닌가’ 하는 완고하고 어두운 옛 생각만 하고 새로이 사회의 상당한 지위에 서는 사람을 쓸데없이 업신여기며 서로 친하고자 하지도 않으며 진정한 사회의 융화를 방해하는 위인이라.”(매일신보, 1917년 1월25일)

[전우용의 우리 시대]이기적인 전문가 시대

바뀐 세상에서 ‘잘되어 가는’ 문벌 낮은 사람들을 천시(賤視), 질시(嫉視)하는 ‘묵은 양반’들을 나무라는 조선총독부 기관지의 글이다. ‘새로이 사회의 상당한 지위에 선’ 문벌 낮은 사람들이란 과연 어떤 부류였을까?

1894년 갑오개혁으로 신분제도가 철폐되자, 신분 대신 직업이 당사자의 사회적 지위를 정하는 일차적 요인이 되었다. ‘신분에서 계약으로’라는 근대화에 대한 정의는 ‘가문에서 직업으로’로 바꾸어도 무방하다. 직업의 다양화, 전문화와 함께 진행된 이 과정은 세계를 이해하는 방식과 세상을 조직하는 틀이 바뀌는 과정이기도 했다.

아시아와 유럽을 막론하고 전근대의 지식 체계는 분석적이기보다는 통합적이어서 선험적으로 전제된 우주론, 세계론에 기반하여 세상 만물을 이해하려 했다.

중세 유럽 기독교 세계에서는 만물의 이치 이전에 신의 섭리가 있었다. 그 지역 사람들에게는 신의 뜻을 이해하는 것이 곧 세상을 이해하는 일이었다. 중세 동아시아의 지식 세계를 지배했던 유교 역시 같은 맥락에서 “한 가지 사물이라도 알지 못하는 것은 유자(儒子)의 수치”라는 태도를 견지했다.

하나의 원리로 모든 것을 이해할 수 있다고 보는 태도는 16세기 과학혁명 이후 급속히 바뀌었다. 17세기 이후 유럽에서는 수집과 배열, 분류와 종합의 과정을 거치는 분석적 접근법이 일반화했고, 이는 곧 아시아로 전파되었다. 우리나라에서도 18세기 이후 ‘실사구시(實事求是)’를 중시하는 학문 태도가 확산했고, 유자들도 언어, 역사, 지리, 생물, 의약 등 특정 분야에 집중하는 경향을 보이기 시작했다. 이는 통합적 지식의 시대와 문벌의 시대가 함께 끝나가는 조짐이었다.

조선 시대 ‘통합적’ 지식인이던 유자와 달리 ‘전문적’ 지식 분야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중인(中人)으로 통칭되었다. 역사학계에서는 양반 바로 아래 신분이라서 상중하의 중(中)이라고 보는 견해가 지배적이지만, 동인, 서인, 남인, 북인과 마찬가지로 서울 중촌(中村, 청계천 양안 일대)에 살아 중인(中人)이라고 보는 견해도 있다. 서울 중인은 의관(醫官), 역관(譯官), 산사(算士), 율사(律士) 등으로 구성되었는데, 현대의 직업 분류에 따르면 각각 의사, 동시통역사, 회계사, 변호사로서 가장 인기 있는 전문 직종에 해당한다. 하지만 당대에는 이들 직종을 높이 평가하지 않았고, 관직도 많이 배정하지 않았다. 이들 직종에서 관직을 얻더라도 승진에는 한도가 있었다. 또 중인 관직을 가진 사람의 자손은 문과와 무과에 응시할 수 없었다. 그들은 잡과(雜科)나 취재(取材)라는 시험을 통해 사실상 관직을 세습하거나 비슷한 처지에 있는 다른 직종 관원의 자제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분야가 전문적이고 학습자가 적어서 출제자와 응시자가 서로 모르는 사이일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 의관의 자제가 역관이 되고, 역관의 자제가 의관이 되는 경우는 무척 흔했다. 이렇게 이들의 전문성은 혈연과도 결합했다. 문벌 낮은 ‘중인’들을 ‘잘되어 가는’ 사람으로 바꿔 준 것이 근대화였다.

중세 유럽 도시들에서도 비슷한 현상이 있었다. 장인(匠人)이나 의사 등 전문 직업인들은 자기들끼리 길드를 만들어 동업자의 재생산 과정을 통제했다. ‘장인의 자격은 같은 업종의 장인들만이 인증할 수 있다’는 길드의 원칙은 동업자의 수를 제한하여 구성원들의 이익을 극대화하는 데에 유효했다. 이 원칙은 근대 사회로 재편되는 과정에서도 높은 수준의 지식과 기술을 요하는 전문 직종들에 계승되었다. 특히 법률, 의료 등 인간의 안전, 생명과 직접 관련되는 직업 종사자들은 국가의 도움을 얻어 신규 진입 장벽을 높게 쌓음으로써 자기 직업의 권위와 안정성을 유지하는 데에 성공했다. 이들은 전문 직업인인 동시에 국가의 법률, 의료, 위생 정책 전반에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정치인이기도 했다.

우리나라에서는 법관양성소(1895)와 의학교(1899)가 각각 당대 최고 학부로 개교함으로써 전문가 시대의 서막이 열렸다.

그런데 일제강점기 각 분야 전문 지식을 통합하고 분배하는 정치의 영역은 일본인들이 독점했기 때문에, 한국인 전문가들은 스스로 탈(脫)정치화하여 자기들의 사적 이익을 극대화하는 데에만 몰두할 수밖에 없었다. 해방 이후 국가가 재구성되고 여러 차례 개혁되는 과정에서도 이들의 관행과 문화는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전문직 종사자들이 자기의 직업적 이익을 공동체 전체의 이익보다 앞세우는 것을 식민지 경험 탓으로만 돌려서는 안되겠지만, 그 영향을 굳이 부정할 필요도 없을 터이다.

지식이 세분되고 사회가 복잡해질수록, 전문가들의 영향력도 계속 커졌다. 문제는 이들이 대체로 자기 전문성의 눈으로만, 자기 직업의 이익 중심으로만 세상을 본다는 데에 있다. 원자력 전문가들이 탈원전에 반대하는 것과 같은 이유로, 검찰은 사법제도 공정화에 반대한다. 전문가 시대의 주요 과제는, 이들의 사익 추구 욕망을 민주적 통제하에 두는 것이다. 그러지 못하면, 이들의 욕망이 민주주의를 집어삼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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