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잔혹한 고통

2019.12.08 20:59 입력 2019.12.08 21:00 수정

무언가를 기다리는 시간은 어떤 의미일까? 뭘 기다리는지, 얼마의 시간인지, 그새 어떤 경험을 하는지에 따라 다르겠지만 결과가 희망적이든 아니든 기다림은 초조, 긴장, 불안, 공포의 경험이다.

[NGO 발언대]더 잔혹한 고통

2014년 2월 나는 서울관악고용노동지청에 있었다. 르노삼성자동차를 ‘남녀 고용평등과 일·가정 양립지원에 관한 법률’(이하 고평법)과 ‘근로기준법’ 위반으로 고발하기 위해서다. 노동자가 평등하고 안전하게 일할 조건을 만들 책무는 사업주에게 법이 부여한 것이다. 고평법은 직장 내 성희롱 신고를 이유로 피해자에게 불리한 처우를 하는 것을 금지했으나 르노삼성자동차는 피해 증언 이후 피해자에 대해 사직 종용, 소문 유포와 조직적인 왕따 등 괴롭힘, 징계, 업무전환 등 부당한 처우는 물론 그를 도운 동료에게도 징계와 대기발령 등 가히 ‘불리한 처우 종합세트’라 할 정도로 심각한 불법행위를 했다. 이에 6개 여성·인권단체들은 르노삼성자동차를 고발하며 적법한 사법처리와 조속한 해결을 촉구했다.

5년10개월이 지난 지금, 르노삼성자동차 직장 내 성희롱 사건은 어떻게 되었을까? 놀랍게도 아직 1심 재판도 끝나지 않았다. 고용노동부와 검찰은 아무런 근거도 안내도 없이 4년이나 붙잡고 있다가 2018년 3월에야 기소했다. 검찰은 처리 지연에 대한 무수한 항의와 국정감사 지적에도 꿈쩍하지 않다가 #미투운동이 촉발된 후에야 르노삼성자동차를 기소했다. 안전하게 일할 수 있는 조건을 만들어달라는 당연한 요구가 회사로부터 온갖 불이익을 받을 이유이며, 검찰이 4년이나 시간을 끌며 기소하지 않을 일인지 납득하기 어렵다. 고발 당시 피해자와 동료는 책상과 의자 외에 아무 비품도 없고 심지어 업무용 컴퓨터도 없는 ‘독방’ 같은 곳에서 점심시간 1시간, 오전·오후 각 10분 휴게시간 외에는 사전 승인 없이 장소를 이탈할 수 없는 대기발령 상태였다. 그런 그들에게 죄를 물을 기회조차 박탈당할지 모르는 불안 속에서 보내야 했던 4년, 재판부의 판단을 기다리는 1년10개월의 시간이, 아니 여전히 언제 끝날지 모르는 막연한 기다림이 어떨지, 감히 누가 상상할 수 있을까?

‘직장 내 성희롱에 대한 문제제기를 이유로 한 불이익조치 금지’는 직장 내 성희롱 피해자가 그 어떤 불이익에 대한 두려움 없이 직장 내 성희롱이라는 불법행위를 말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르노삼성자동차 피해자는 국가와 법을 믿었고 국가에 역할을 요청했을 뿐이다. 그런데 강요된 기다림의 시간, 국가는 무엇을 했는가? 이제 기다림의 잔혹한 고통을 멈춰야 한다.

르노삼성자동차가 피해자와 동료에게 한 일련의 조치들은 성희롱 피해보고 이후 일어난 일들로 명백히 성희롱 피해 주장을 이유로 한 불이익 조치들이다. 이미 2017년 민사재판을 통해서도 확인된 사실이다. 법원은 조속히 입법 취지에 맞는 정의로운 판결로 르노삼성자동차에 책임을 물어야 한다. 더는 한국사회에서 불이익조치가 용납되지 않는다는 것을 확인해 노동자들이 두려움 없이 말해도 되는 사회라는 신뢰를 회복해야 한다.

결과만큼이나 중요한 것은 과정이다. 고용노동부나 검찰의 임의적 사건 지연을 막는 제도를 마련하고 모든 처리과정이 피해자에게 투명하게 전달될 수 있는 방안을 마련해야 한다. 그래야 ‘이제는 변할 수 있다’는 희망과 국민적 신뢰를 회복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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