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다른 기도, 버킷리스트

2020.02.24 20:50 입력 2020.02.24 20:51 수정

[이문재의 시의 마음]또 다른 기도, 버킷리스트

“부담 갖지 마세요, 그림책이니까.” 책읽기 모임을 통해 알게 된 선생님께서 집 주소를 여쭤보더니 엊그제 책을 한 권 부치셨다. 선생님 친구분이 펴냈는데 널리 알려진 작가도 아닌 데다 1인 출판사에서 나온 것이어서 여기저기 알려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문재의 시의 마음]또 다른 기도, 버킷리스트

소포를 열어보니 유현미 작가의 그림책 <마음은 파도친다>(도서출판 가지)였다. ‘지구를 닮은 얼씨 드로잉(Earthy Drawing)’이란 부제가 달렸다. 작가가 낯설어서 프로필부터 살폈더니 미술치료를 공부하다 우연찮게 그림에 빠졌다고 한다. 작가는 구순인 아버지에게 그림을 가르치며 함께 그림책을 만들고 촛불집회를 기록한 그림책도 펴냈다. 개인전과 원화 전시회를 열기도 했다.

작가는 머리말에 “인간은 누구나 예술가로 태어난다”라고 썼다. 그 예술가 중 한 사람이 다름 아닌 작가의 아버지였다. 평생 농사를 지은 구순 노인은 뒤늦게 그림을 그리면서 예술적 자아를 발견했다. 작가는 쪼그려 앉아 꽃그림을 그리는 아버지에게서 “인간이란 존재의 경이로움”을 목격했다고 한다. 인간은 ‘잘 놀’ 때, 예컨대 그림을 그릴 때 자기표현의 기쁨, 자유와 해방감, 참다운 인간성의 회복에 이른다고 작가는 말한다.

작가가 관찰한 대상은 우리가 주위에서 흔히 마주치는 평범한 것들이다. 해남 할머니들이 국에 넣어 먹는 엉겅퀴, 바람 부는 쪽으로 휜 소나무, 인수봉을 지키는 털북숭이 개, 마을 하천에 찾아든 민물가마우지, 지하철에서 마주친 장삼이사들, 그림에 집중하는 늙은 아버지, 세월호 유가족, 광화문 촛불집회 등등.

그런데 내가 글쟁이여서 그런지 그림보다 글이 눈에 들어올 때가 많았다. 가령 벌레에게 뜯어 먹힌 플라타너스 잎사귀 그림 옆에다 “장엄하다”라고 쓴다든지, “사방이 시여서 아무 시도 써지지 않는 곡성 산골마을 별똥이네” 같은 대목과 마주치면 작가가 왜 ‘지구를 닮은 드로잉’이라고 밝혔는지 조금 알 것 같았다. ‘지구의 마음’은 지하철에서 고개를 푹 숙인 채 잠든 여성을 보고 안쓰러워하거나, 구걸하는 노인에게 선뜻 지폐를 건네는 동남아 청년에게 보내는 박수로 번진다. 책을 덮고 나니 작가의 마음씨가 그려졌다. 올바르면서도 따뜻하고, 정확하면서도 너그러울 것 같은.

선물로 받은 책이어서만은 아니다. 내가 이 책을 각별하게 여기는 이유가 또 있다. 이 그림책이 내 오랜 버킷리스트를 되찾아줬기 때문이다. 드로잉을 배워 그림책 한 권을 내고 싶은 오랜 꿈이 있었다. 중학교 시절 손때가 묻었던 수채화 붓과 대학교 때 옆구리에 끼고 다니던 스케치북이며 목탄, 4B 연필이 못내 잊혀지지 않았다. 5년 전인가 드로잉 관련 책을 서너 권 구해놓고는 열어보지 못했다. 독학은 어려울 것 같아 미술학원에 등록할까 고민하다가 포기하고 말았다.

돌아보니 한 페이지를 가득 채우던 버킷리스트가 다 사라지고 말았다. 희곡 쓰기와 연극 연출, 대륙횡단 트럭 운전사, 실크로드 도보여행, 사막에서 밤하늘 별 보기, 사시사철 꽃이 피는 마을 만들기 등등. 이제 남은 목록이 몇 안 된다. 그림책을 한 권 펴내는 것이 내밀한 꿈이라면 공적 의미를 갖는 꿈도 있다. 전환 설계, 즉 더 나은 미래에 관한 담론을 만들어가는 데 어떤 방식으로든 동참하고 싶다는 것이다. 그중 하나가 뜻 맞는 이들과 어울려 예술학교를 세우는 것이다. 시민 스스로 자기표현 욕구를 찾아내고 그것을 함께 키워나가는 열린 예술학교.

유현미 작가가 말했듯이 모든 사람은 예술가로 태어난다. 하지만 대다수가 사회적 압력과 경제적 공포에 짓눌려 자기 안의 표현 욕구를 억누른다. 놀이로서의 예술을 한가한 사치로 치부하거나 은퇴 이후로 미룬다. <마음은 파도친다>가 증명하듯이 생의 후반부에라도 예술과 만나면 놀라운 변화가 일어난다. 남녀노소를 구분할 필요도 없다. 하버드대에서 진행한 예술교육 프로그램 ‘프로젝트 제로’에 따르면, 예술은 자기해방뿐 아니라 타자에 대한 감응력을 높여준다. 창의성과 관계 맺기 능력을 키워준다는 것이다.

많은 분들이 알고 계시겠지만 꿈을 이루는 비결은 단순하다. 꿈을 가질 것, 그 꿈을 구체화할 것, 그리고 절대 잊지 말 것. 우리가 꿈을 이루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 중 하나는 꿈이 없기 때문이다. 또 다른 결정적 이유는 꿈을 잊어버리기 때문이다. 버킷리스트를 실현하는 비결도 다르지 않다. 잊지 않으면 된다. 그러니 버킷리스트는 또 다른 기도다. 매번 절실해서 새로운 ‘오래된 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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