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 게이츠의 영적 언어와 과학적 언어

2020.04.24 20:55

빌 게이츠의 가짜편지 소동은 가짜뉴스에 대한 경각심을 주는 것으로 마무리됐다. 한달 전쯤 ‘코로나 바이러스의 14가지 교훈: 우리 모두는 평등하다’라는 제목으로 온라인에 유포됐던 이 편지는 “이 세상에 발생하는 모든 일 뒤에는 영적 목적이 있다는 것을 강력하게 믿는다”는 말로 시작해서 평등, 사랑, 자유, 협력의 가치를 준엄하게 일깨운 다음, 이 바이러스는 “지구가 아프다는 것을 우리에게 깨닫게 해주는 올바른 교정자”라는 메시지를 전달한다. 편지가 전 세계로 급속히 퍼지는 와중에 출처에 대한 의문이 제기됐고, 내용을 보도했던 영국의 ‘선’지는 사과문까지 게재했다.

[세상읽기]빌 게이츠의 영적 언어와 과학적 언어

이 소동을 지켜본 조작자는 빌 게이츠의 이름을 도용해 자신의 주장을 퍼트리려는 의도가 적중했다며 회심의 미소를 지었을지 모른다. 실제로 바이러스를 ‘교정자’로 보는 영적 언어는 일상언어에 비해 울림이 크고, 한국에서도 심심찮게 공유돼 나에게도 최근까지 몇 차례나 전달됐다. 그런데 마침 넷플릭스에서 <인사이드 빌 게이츠>라는 3부작 다큐멘터리를 본 뒤 그에 대해 다시 생각하던 참이라 가짜편지는 매우 흥미로웠다.

우선 빌 게이츠가 코로나19에 대해 많은 발언을 하고, 그럴 만한 자격이 있는 건 사실이다. 그는 5년 전 TED 강연에서 “앞으로 인류의 위협은 미사일이 아니라 미생물일 것”이라며, 이에 대비할 것을 촉구했다. 2000년 ‘빌 앤드 멀린다 게이츠 재단’을 설립한 직후부터 세계백신면역연합(GAVI)에 큰돈을 기부했고, 2017년 전염병대비혁신연합(CEPI)을 출범시켰다. 최근 TED의 코로나19 특집방송에 나와 해박한 지식을 자랑하면서 1단계 저지선인 진단검사에서 한국의 성과를 최고로 평가하며, 이에 실패한 미국 정부는 2단계 저지선인 거리 두기를 늦추면 안된다고 주장했다. 유례없는 경기침체가 예상되지만, 인명 손실을 방치할 수 없다는 것이다.

다큐멘터리를 보면 그가 관심을 쏟아온 분야는 개발도상국의 수세식 화장실 보급이다. 그는 아프리카 아이들이 똥오줌으로 오염된 강물을 마시고 설사로 죽는다는 신문기사를 본 다음, 변기 혁신에 나섰다. 보통 수세식 변기는 물과 전기로 정수되는데, 두 가지 모두 아프리카에서는 부족한 자원이다. 빌 게이츠는 대학들에 호소했으나 대학의 연구·개발은 기업과 군대의 수요에 맞춰져 있다. 비슷한 문제의식을 가진 코트디부아르 출신 과학자를 재단으로 초청한 그는 배설물을 태운 열로 자체 정수되는 변기를 개발했고, 설치비용을 낮추는 단계에 있다.

빌 게이츠의 또 다른 주요 관심사는 원자력발전소 개량이다. 그 역시 기후위기를 심각하게 걱정한다. 탄소배출량을 줄이려면 에너지 전환이 필요한데 태양광, 풍력 등 재생에너지는 날씨에 따라 발전량이 크게 달라지는 간헐성 문제를 해결하기 어렵다. 위험하지 않은 원전 쪽으로 방향을 돌린 그는 네이선 미어볼드, 로웰 우드 등 재야 발명가들과 손잡고 농축우라늄 대신 열화우라늄을 사용한 원자로의 원리를 개발한다. 이들에 따르면 체르노빌과 후쿠시마를 비롯해 현재 가동되는 대부분 원전은 1960~1970년대 기술이다. 신형 원자로는 원전사고의 최고 위험을 방사능 유출이 아닌 정전으로 낮추며, 폐연료봉을 반영구적으로 사용해 핵폐기물을 획기적으로 줄이는 게 핵심이다. 이 기술을 바탕으로 테라파워라는 회사를 설립한 빌 게이츠는 중국에 기술을 수출하기로 시진핑 국가주석과 합의하지만, 미·중 간 무역갈등으로 중단된 상태다.

나는 빌 게이츠를 모른다. 그의 입장에 충실한 다큐멘터리를 보면서 자선사업과 수익사업 사이의 거리를 가늠해보게 된다. 인류애와 막대한 수입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으려 할 수도 있다. 프로듀서는 질문을 던진다. “당신은 과학기술이 모든 것을 구한다고 믿고 있지 않나?” 답변은 겸손하다. “기술혁신이 내가 유일하게 들고 있는 망치다.” 망치를 들고 있으면 모든 문제가 못으로 보인다는 심리학자 에이브러햄 매슬로의 말을 인용한 것이다.

가짜편지가 흥미로운 건 이 대목이다. 빌 게이츠의 목표가 인류의 전염병 퇴치라면, 선진국과 개발도상국 간 격차 해소라면, 기후변화를 막는 것이라면 영적 언어와 과학적 언어의 간극은 멀지 않다. 과학기술이 기업과 군대의 편에 서서 상품을 개발하고 국익을 도모하는 것을 넘어 인류, 생명, 지구로 시야를 넓힌다면 그 최종 목표는 종교적 추구와 다를 바 없다. 바이러스는 인류의 잘못을 일깨우는 교정자여도, 아니어도 상관없다. 과학과 철학과 종교는 삶의 의미를 묻는, 같은 뿌리에서 나왔다. 편지의 조작자가 이 점을 염두에 두었다면, 그도 빌 게이츠처럼 천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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