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스트 코로나 사회

2020.04.23 20:49 입력 2020.04.23 20:58 수정

지하철, 버스, 택시, 고속철, 비행기, 선박을 타고 자유롭게 이동한다. 사무실, 공장, 농장, 공사장 등 일터에 나가 사람들과 부대끼며 일한다. 시장, 백화점, 쇼핑몰, 음식점, 술집, 공원, 야구장, 축구장에 나가 사람들과 함께 소비하고 즐긴다. 교회, 성당, 사찰, 서원에 나가 사람들 틈에 끼여 공동 집회를 연다. 학교, 학원, 유치원에 나가 사람들과 어울리며 공부한다. 코로나19 확산 이전에 우리가 당연하게 누려왔던 일상의 삶이다. 이 당연한 삶이 코로나19 확산을 막기 위한 물리적(사회적) 거리 두기 운동을 통해 의심에 처했다.

[세상읽기]포스트 코로나 사회

얼굴과 얼굴을 맞대고 상호작용하지 않으면 일상의 삶 자체가 위기에 처한다는 사실이 비로소 도드라진다. 그제야 일상의 삶이 우리 모두 대면 상호작용을 통해 구축하고 유지해온 놀라운 공동의 성취로 보인다. 사회학은 일찍이 이를 잘 알고 있었다. 특히 사회학의 창건자 중 하나인 게오르크 지멜은 대면 상호작용이 아무것도 아닌 텅 빈 물리적 공간을 유의미한 사회적 공간으로 만든다고 설파했다. 대면 상호작용에 들어간 사람들은 서로에게 감각으로 영향을 미친다. 그중에서 눈 마주침은 대면 상호작용의 가장 직접적이고 순수한 형식이다. 눈 마주침을 통해 각자 고유한 영혼을 교환하고 서로 인정하면서 시선의 호혜성이 수립된다. 이 시선의 호혜성이야말로 자유롭고 평등한 개인들이 구성하는 근대 사회성의 씨앗이다.

코로나19의 기세가 어느 정도 꺾이자 벌써 사람들은 코로나19 이전 사회로 되돌아갈 희망에 들떠있다. 그런데 그 사회가 과연 돌아갈 만한가? 한국에서는 사회를 구조나 체계와 같은 거대한 힘으로 보는 시각이 막강하다. 구조나 체계가 가하는 압박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이대로 산다고 체념한다. 어떤 사람들은 신자유주의 때문에 유연한 노동시장으로 구조조정할 수밖에 없다고 하고, 또 어떤 사람들은 제4차 산업혁명 때문에 로봇과 인공지능이 사람을 대체할 수밖에 없다고 한다. 이러한 구조 또는 체계 중심적 사고는 요번 코로나19 재난을 통해 그 한계를 분명히 드러냈다. 거리 두기로 사회가 휘청거린다는 사실은 사회가 사람과 사람의 대면 상호작용에 터한 지속적인 과정이라는 점을 명확히 보여준다.

코로나19 이전 한국 사회는 어떤 모습이었나? 코로나19보다 더 무서운 혐오 바이러스가 집 밖 세계에 가득했다. 경제적 효율성을 들어 많은 사람을 대면 상호작용도 할 수 없는 소수자로 내몰았다. 계급, 젠더, 지역, 나이, 교육, 몸, 섹슈얼리티 등 온갖 사회적 범주에서 소수자의 자리를 점한 사람이 집 밖에 나가길 두려워했다. 나갔다가는 소수자 혐오 바이러스에 감염된다. 저항하면 혐오 바이러스 보균자로 취급당해 더한 혐오를 뒤집어쓴다. 사정이 이러하니 소수자는 대면 상호작용에 들어가지 못하고 자가격리하고 자가봉쇄당했다. 다수자조차도 대면 상호작용을 통해 함께하던 공동 작업에서 떨어져 나와 홀로 기계와 씨름하게 되었다. 관리와 행정의 편의성을 위해 공공시설의 출입구를 차단하여 오고 가는 사람을 최소화했다. 사회 전체적으로 대면 상호작용하는 사회적 공간이 쪼그라들었다.

한국이 거리 두기를 잘했다고 다른 나라에서 칭송하는데, 이런 사정을 알게 되면 꼭 기뻐할 수만도 없게 된다. 우리 사회가 대면 상호작용 없이도 나름 작동해온 무감각한 기계였다는 사실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물론 비대면 상호작용은 키오스크가 보여주듯 일부 사용자에게 효율성과 자유를 가져다준다. 하지만 극단으로 가면 사회 그 자체를 위협한다. 다른 사람과 얼굴과 얼굴을 마주하여 시선을 호혜적으로 주고받을 수 있어야 사람으로 살 수 있다. 우리가 만들어가야 할 포스트 코로나 사회는 누구나 대면 상호작용의 당사자가 되어 시선을 호혜적으로 주고받을 수 있는 감각의 공동체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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