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환시대 전문가의 자격

2020.05.18 03:00 입력 2020.05.18 03:06 수정

[조한혜정의 마을에서]전환시대 전문가의 자격

애니메이션 작가 스티브 커츠(Steve Cutts)가 2012년 12월21일 유튜브에 올린 <Man>은 한 남자 인간이 딱정벌레를 밟아 죽이고 손을 번쩍 들며 “앗싸” 하는 장면에서 시작한다. 지나가던 뱀 두 마리를 잡아 가죽구두를 만들어 신은 그는 닭을 잡아 살을 부풀려 튀겨 먹고 양의 다리도 분질러 먹는다. 총을 들고 나타난 그는 물개를 잡아 코트를 만들어 입고 거대한 곰을 죽여 박제시키고 코끼리 상아로 피아노 키보드를 만들어 연주하는 고상한 교양인이 되기도 한다. 엄청난 양의 종이를 찍어내느라 우거진 삼림은 사라지고 콘크리트 빌딩 숲을 이룬 거대 도시는 밤낮없이 에너지를 태우며 탄소를 배출한다. 거대 축산 농장과 유전자 조작 농작물 가공소가 곳곳에 들어서고 온갖 생체 실험이 자행되면서 생태계 균형은 깨져간다. 쓰레기 더미 지구 꼭대기 왕좌에 오른 이 남자는 스스로 왕관을 쓰고 흐뭇해하며 시가를 피운다. 이때 우주선을 타고 도착한 눈이 몇 개 달린 외계인들이 그를 기이하게 여기며 왕좌에서 끌어내 밟아 버린다. 그리고 “Welcome!”이라는 팻말을 남기고 지구를 떠난다.

코로나19로 자중의 시간 지나자
위기의 진단·처방 작업 들어가
성공적 방역국가로 자부심도
새 시대 맞는 ‘온라인 실험’ 착착
그러나 소외된 사람들은 늘 있어
스스로 낯선 자리에서 성찰해야

이 천재 애니메이터가 2020년 4월26일 코로나19 사태를 맞아 유튜브에 <Man 2020> 속편을 올려주었다. 자가격리로 인간들이 사라진 도심에 숨어 있던 생명체들이 진출해 활보하는 모습을 담은 작품이다. 눈이 세 개 달린 외계인은 오지 않았지만 기후변화로 홍수와 가뭄, 산불 등 재앙을 겪던 인간 포식자들은 이런 영상을 보면서 바이러스의 공격 앞에서 드디어 자중의 시간을 갖게 되는 것일까? 침몰하는 타이태닉호의 시간이 이런 시간이 아니었을까? 살겠다고 밀치고 아우성치는 사람, 평화롭게 죽어가겠다고 갑판에서 숨을 고르며 바이올린 합주를 준비하는 사람, 그 와중에도 짙은 사랑을 하는 사람, 모든 것을 모른 척하려는 사람들. 이런 침몰을 일찍이 감지해 ‘헬 (조선)’을 말하던 대한민국 청년들은 서구 선진 제국들이 위기 앞에서 속절없이 무너지는 것을 보면서, 방역을 잘해내고 있는 한국(조선)의 국민으로서 자부심을 갖기 시작하는 것 같다. 군사주의와 과학기술주의에 바탕을 둔 ‘문명국’ 서구는 19세기와 20세기 초 ‘벨 에포크(가장 아름다운 시대)’를 찍은 후 양차 세계대전을 겪으며 몰락의 길로 접어들었다. 아이를 낳고 키우며 생명과 평화의 가치를 지향하기보다 제국주의적 확장을 통해 꽃을 피운 서구발 자본주의는 이제 그 수명을 다한 것이다. 서구 근대 문명에 물든 지구인들이 <자본론>과 <종의 기원>만이 아니라 아나키스트로 분류되어온 크로포트킨의 <만물은 서로 돕는다>도 열심히 읽었다면 상황은 좀 달라져 있을까? ‘생존 투쟁’ 못지않게 ‘상호 부조’의 법칙이 종의 진화의 법칙임을 인정했다면 인류사의 방향은 달라졌을까? 남자만이 아니라 여자까지도 사냥꾼으로 만들어 버리고 있는 이 파괴적 역사의 끝은 어디일까?

일정하게 자중의 기간을 지낸 영리한 포식자, 인간들은 이제 자신들이 창조해낸 사이버스페이스로 나와 위기 진단과 처방 작업에 들어가기 시작했다. 이들은 성장주의와 과학기술주의 프레임에서, 선진국 타령에서, 객관주의와 절대 보편원리를 향한 거대담론의 위력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모두가 다시 이론가와 전문가가 되려는 지금, 그냥 힘 빼고 소박하게 둘러앉자는 말을 하고 싶다. 마스크를 쓰고, 또는 모니터 앞에서 서로 돕고자 하는 이들과 둘러앉아서 난감한 시대를 이야기하는 자리를 갖자고 제안하고 싶다. 어쩌면 이야기의 내용은 크게 중요하지 않을 수도 있다. 유아독존적 태도를 버리고 만나는 것 자체가, 다른 세대, 다른 계급, 다른 취향을 가진 이들이 만나는 것 자체가 기적이고 새로운 시작일 테니까 말이다.

온라인 토론과 실험들이 가져올 폭발적 잠재력이 예상되는 시점이다. 그런데 실천적 지식인 로버트 라이시가 분류한 계급 중 가장 위에 속하는 ‘원격근무가 가능한 계급(the remoters)’만이 이 실험에 참여할 수 있다는 점에 유념하자. ‘필수적인 일을 하는 노동자(the Essentials)’ ‘임금을 받지 못하게 된 노동자(the Unpaid)’와 ‘잊혀진 노동자(the Forgotten)’ 계급이 공동운명체임을 간과하는 연구는 도움이 안 될 것이니까 말이다. 같은 나라의 일원을 떨구어낼 때, 종의 일원을 떨구어내기 시작할 때 그 국가는, 그 종은 자멸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스스로의 자리를 낯설게 보며 자신의 한계를 넘어 성찰하는 것, 이것이 전환기 전문가의 기본 자격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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