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반도 완충지대

2020.06.09 03:00 입력 2020.06.09 07:56 수정

처음엔 눈을 의심했다. “북한의 비핵화? 맞다. 빠르게 완료하자. 그런데 동시에 할 일이 있다. 미국 핵도 없애야 한다. 왜 북한 핵만 없애야 하나? 핵확산금지조약(NPT)은 결국 소수 핵보유국의 독점 보장 협약이다.” 이런 글을 누가 썼을까? 이건 북한의 속마음이 아닌가. 하버드 경제학자, 제프리 삭스가 그 사람이다. 42세의 나이로 대통령 자문위원을 하면서 폴란드와 러시아에 ‘쇼크요법’을 퍼뜨린 바로 그 사람. 신속한 가격자유화는 하이퍼 인플레이션을 낳았고 전격적인 사유화는 자산의 헐값 매각과 매판자본이나 외국자본의 자산탈취로 이어졌다. 대혼란을 수습하기 위한 안정화 정책까지, 이들 나라는 10여년에 걸친 ‘전환 불황’을 겪어야 했다. 그는 말 그대로 자유주의 경제정책 또는 시장 확대의 사명을 띤 선교사였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시장과 민주주의를 세계에 전파해야 세계의 번영과 평화가 온다는 자유주의 헤게모니는 20세기 미국 외교의 성경이었다. 삭스는 이 성경의 ‘미국 예외주의’를 통렬하게 비판하는 책(<미국의 새로운 외교정책>)까지 썼다. .

정태인 독립연구자·경제학

정태인 독립연구자·경제학

미국의 ‘대전략(grand strategy)’ 논쟁은 1991년 소련이 붕괴하면서 앞으로 어떤 전략을 취해야 하는가로 시작했고, 2000년대 들어 중국이 우뚝 서자 한층 뜨거워졌다. 미국이 헤게모니를 행사하기 위해 세계에 계속 관여하는 것이 옳은가, 아니면 냉전 시대가 끝났으니 이제 그만 후퇴해야 하는가? 아주 거칠게 분류하자면 후퇴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크게 두 부류가 있다. “이제 미국의 힘이 예전만큼 압도적이지 못하니까 다른 지역 문제는 그 지역에 맡기자”(역외 균형론)는 현실주의자들과, 원래부터 미국의 모든 군사적 개입에 반대했던 평화주의자들이다. 독재를 없애고 민주주의를 뿌리내리겠다는 미국의 개입은 곧잘 수많은 인명의 살상과 내전으로 이어졌다. 아름다운 기치와 달리 또 다른 독재 집단을 지원하는 경우가 많았고, 곧잘 종족 간 힘의 균형을 깨뜨렸기 때문이다. 삭스는 말하자면 관여론자에서 평화주의 후퇴론자로 변신한 것이다.

미국과 중국의 힘겨루기는 “21세기판 투키디데스 함정은 이런 거구나”, 한탄하게 만든다. 그 어느 때보다 광범한 국제협력이 필요한 때 두 강대국은 바이러스의 진원지를 놓고 설전을 벌였다. 미국 대통령은 이럴 때 능력을 발휘하라고 만든 세계보건기구(WHO)에 돈을 대지 않겠다고 위협한다. 25% 관세로 미봉한 1차 미·중전쟁은 5G의 주도권 싸움으로 번졌고 급기야 거미줄처럼 얽혀 있는 글로벌생산사슬에서 중국을 빼버리자는 주장으로 치달았다. 미국은 아예 탈중국 경제번영네트워크(EPN)를 만들어서 다른 나라에 선택을 강요한다. 중국에 바로 붙어 있는 한국이야말로 이 포위망에 없어서는 안 될 존재일 것이다. 지난 10년 내내 양 대국 사이에 끼여 시달렸으니 그리 새삼스러운 일은 아니지만 갈수록 압력의 강도가 높아지니까 점점 더 괴롭다.

이런 와중에 북핵 협상이 진행되고 있다. 관련국 어디든 중재안을 내놓으면 두 나라는 어느 쪽에 이익인가를 따져서 조금이라도 손해다 싶으면 단호하게 반대할 것이다. 제로섬게임이다. 미국은 오바마 정부 때처럼 ‘우아하게’ 현재의 교착상태를 방치할지도 모른다. 계속되는 경제제재에 숨쉬기 힘들어진 북한이 눈길이라도 끌려고 도발을 한다면 이번엔 정말 위험해질 것이다. 대륙간 탄도탄, 즉 미국 본토를 확실하게 위협하는 것밖에 별수가 없기 때문이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마침 평화연구자, 정욱식이 <한반도의 길, 왜 비핵지대인가?>라는 상세한 지도를 내놓았다. 이미 몇 지역에 선례가 있는 비핵지대 조약은 국제법적 구속력을 지니고 있고 관련국들도 한반도평화에 대한 의무를 지게 된다. 남북한이 모두 검증을 받으니 그 범위와 수단의 선택도 공정해진다. 핵사찰과 핵무기 제거에는 오랜 시간이 걸린다. 그동안 한국은 미국의 확장억제를 보호막으로 삼을 것이다. 그렇다면 북한도 중국(과 러시아)의 한시적 확장억제라는 방패를 사용할 수 있다. 마침내 한반도가 비핵지대가 되었을 때 미국과 중국, 또는 일본 어느 나라의 공격도 불가능하게 하는 일종의 ‘공동안보’ 방안도 조약에 포함되어야 할 것이다. 이 완충지대는 정의상, 주변 강대국 어느 한쪽의 손을 들어주면 안 된다.

미국과 중국이 자제하지 않으면 세계는 말 그대로 절단난다. 한반도가 두 나라 사이의 완충지대가 되어 절단을 막는 것은 둘 모두의 이익이다. 제로섬게임의 해를 찾는 방법은 간단하다. 내가 선택지를 만들고 상대가 고르게 하면 된다. 물론 그 선택지를 남북이 만들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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