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 그들의 혁명을 지지한다

2020.12.22 03:00 입력 2020.12.22 03:02 수정

어쩌다 보니 서로 다른 매체에서 연이어 혁명을 부추기고 있다. 2015년에는 날로 치솟는 불평등 지수를 보면서 아이들에게 “차라리 혁명을 준비하렴”이라며 선동했고(한겨레, 6·1) 작년에는 전 세계의 젊은이들과 함께 기후위기에 맞선 툰베리의 이야기에 “아이야, 혁명의 때가 왔구나” 하고 환호했다(시사IN, 11·8). 이제 세 번째이자 마지막이다.

정태인 독립연구자·경제학

정태인 독립연구자·경제학

지금 한국의 불평등은 피케티의 β를 기준으로(국민순자산/국민소득) 마르크스가 2년에 한번씩 혁명을 (그릇) 예언했던 1870년대보다 더 심하다. 옛날 같으면 혁명을 꿈꿨음직한 가장 ‘발칙한’ 아이들이 “갭투자” “암호화폐” “다단계 판매”와 같은 각자도생의 길을 택했다.

스스로 1987년 민주화 대투쟁의 주역이라고 자랑하는 왕년의 혁명가들은 정권이 위태로워질 때가 되어서야 겨우 종합부동산세 인상을 받아들였다. 물론 선거 기간 동안은 이미 충분히 낮은 종부세마저 올리지 않겠다고 다짐해서 부동산 가격 폭등을 부추겼다. 1987년생 국회의원 장혜영이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싸우겠다던 심장이 어째서 식어버린 것이냐”고 질타했지만 누구 하나 부끄러워했다는 얘기는 들리지 않는다. 그들이 과반을 차지한 ‘혁명의회’는 ‘중대재해기업처벌법’도 외면했다. 그들이 표를 호소해야 할 사람들은 아파트 가격과 아이들 입시에 목숨을 거는 상위 10%, 그리고 이들이 만든 죄수의 딜레마 게임에 속절없이 끌려들어가는 중산층이지, 산업재해로 하루 6명씩 죽어가는 하층 노동자들이 아니다. 1992년생 국회의원 류호정이 고 김용균의 복장으로 호소를 해도 그들은 여전히 옷만 바라봤다.

바이든 미국 대통령 당선자가 2050년 ‘넷제로’를 선언하고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마저 2060년을 최종 시한으로 지목하자, 한국이 기후악당이라는 사실을 부정했던 문재인 대통령도 10월28일 국회에서 2050년 ‘탄소중립’을 선언했다. 하지만 파리협정에 따라 제출한 실행계획(NDC)은 ‘적폐 정부’가 제출했던 감축목표(30년 BAU 대비 37%)를 기준만 바꾼(17년 배출량 대비 24.4%) 것이다. 탄소 배출 감축은 걸레의 물을 짤 때처럼 처음엔 쉽지만 뒤로 갈수록 어려워진다. 그래서 2030년까지 10년 동안 절반가량을 감축해야 한다는 건데, 기후운동 시민단체가 3.5℃안이라고 평가한 수치, 즉 전 세계가 한국처럼 탄소 배출을 줄이면 2050년 지구 온도를 1.5도 한계의 두배 이상 오르게 만들 값이라고 평가한 과거 수치를 그대로 제출한 것이다. 그뿐만 아니다. 전 세계 경제학자들이 탄소 배출을 줄이는 유력한 수단이라고 인정한 탄소세도 “아직 도입을 말할 단계가 아니라”는 것이 경제부총리의 인식 수준이다. 생태위기는 지극히 정치적인 문제지만 실제로 목숨이 걸린 청년들의 목소리는 아직 약하고, 그보다 어린 세대는 투표권조차 없다.

한국은 코로나19 방역 모범국으로, 방역과 경제에 성공한 동아시아 5개국에 속했다. 하지만 지난 5월 바이러스의 극성이 잦아들자 한국 정부는 경제적 어려움을 풀자며 재빨리 방역을 완화했고 반대로 위험 신호에는 미적미적 반응했다. 늦은 봄부터 여름 내내, 가을의 대유행에 대비해서 방역자원을 강화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았지만 정부와 국회는 예산에 반영하지 않았다. 그리고 지금 기하급수로 사망자가 늘어나고 있는데도 복지부 장관은 방역 강도를 높이라는 전문가들에게 “경제를 모른다”고 훈시했다. “방역이 곧 경제”라는 사실을 전 세계가 거듭 입증했고 한국은 그 모범사례였는데도 말이다.

위기는 시시각각 닥쳐오는데 적폐를 청산한다는 정당은 무능할 뿐 아니라 오만하기까지 하다. 절망은 죽음에 이르거나, 아니면 혁명을 낳는다. 투기는 탈출로가 아니라 파멸의 길이다. 미국이나 유럽에서 본 대로 거대 정당들이 야합할 때 절망에 빠진 국민들은 폭력적, 배타적, 고립주의적 포퓰리즘이라는, 사이렌의 유혹에 곧잘 넘어간다. 이런 개인적, 집단적 퇴행을 모두 막을 수 있는 것도 혁명이라는 이름으로 불렸던 어떤 사건이다.

고백하건대 어떻게 해야 혁명을 할 수 있는지 나는 잊었다. 아니 알 수 없다. 단지 배신하지 않았다고 해서 이미 굳어버린 사고와 감성으로 미래의 길을 가늠할 수 없기 때문이다. 다행히 17살 툰베리는 비전을 보여줬고 영화감독 이길보라는 연대의 공동체라는 열쇠를 제시했다. 소수의 청년 정치인들은 한 걸음씩 그 희망을 향해 내딛고 있다. 우리는 들불이 되지 않으면 촛불도 희망으로 이어지지 못한다는 사실을 생생히 보았다. 이미 시작된 그들의 혁명을 온몸으로, 또 진심으로 지지한다.

추천기사

바로가기 링크 설명

화제의 추천 정보

    오늘의 인기 정보

      추천 이슈

      이 시각 포토 정보

      내 뉴스플리에 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