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낮의 아이는 우리의 아이

2020.06.19 03:00 입력 2020.06.19 03:04 수정

영화 <아무도 모른다> 속 아이들은 한낮의 거리를 헤매지만, 아무도 그 존재를 모른다.

영화 <아무도 모른다> 속 아이들은 한낮의 거리를 헤매지만, 아무도 그 존재를 모른다.

물 반 곡물 반, 죽을 먹고 난 소년이 배식당번을 찾아가 부탁한다. “조금 더 먹어도 될까요?” 배식당번은 눈이 두 배나 커져서 부리나케 구빈원장을 찾아간다. 턱이 젖을 정도로 기름진 식사를 하던 그들은, “장래 교수형감”이라는 저주와 함께 매질을 한다. 그것도 모자라 5파운드에 사내아이를 팔아넘긴다. 1838년작 찰스 디킨스의 소설 <올리버 트위스트>의 한 장면이다.

강유정 강남대 교수·영화평론가

강유정 강남대 교수·영화평론가

영화로도 여러 차례 만들어진 <올리버 트위스트>에는 다종다양한 아동학대가 등장한다. 몸집이 작은 아이들이 굴뚝 청소를 하다 질식사하는 건, 노동 효용률을 높이다 생긴 실수 정도로 통용됐다. 산업혁명 시기 19세기 유럽 소설을 읽다보면 올리버와 같은 학대 아동을 자주 만나게 된다. 빅토르 위고의 소설 <레미제라블>(1862)의 코제트가 위탁가정에서 양육비를 갈취당한 채 노동하는 것이나, 샬럿 브론테의 소설 <제인 에어>(1847)의 제인이 붉은 방에 갇히는 것 역시 명명백백한 학대이다.

19세기 유럽 소설에 등장하는 아동학대에는 이중적 차원이 존재한다. 하나가 가족, 가정 내에서의 학대라면 다른 하나는 바로 구빈원이나 기숙학교와 같은 공적 기관과 교육기관에서 발생하는 학대이다. 올리버의 구빈원이나 제인의 기숙학교에서 ‘정의’를 가르친다는 명분으로 거듭되는 체벌이나 투옥, 매질 같은 것 말이다.

<제인 에어>의 제인이 숙모댁에서 겪는 학대는 계부나 계모에게 학대받는 경우와 닮아 있다. 20세기 초까지의 문학이나 영화를 살펴보면, 아동학대는 마치 혈육이 아닌 가족 사이에서 만성적으로 발생하는 사건처럼 묘사되는 경우가 많다. 영화 <장화, 홍련>의 모태가 된 전설처럼, 계부나 계모니까 학대를 한다는 식으로 말이다. 작가 오정희의 소설 <옛우물>에도 우물에 빠져 죽은 ‘정옥’이라는 소녀가 등장하는데, 정옥이 역시 계모에게 계속 설움을 당하다 목숨을 잃은 것으로 그려진다. 안타깝게도, 많은 소설과 영화, 드라마에서 계모나 계부의 학대가 당연한 듯이 재현되었다.

아동과 어른의 구분이 없던 시절 대개 교육은 길거리에서 이뤄졌다. 아이들은 스스럼없이 어른들과 농담하고, 금지될 것 없이 같이 먹고 마시면서 그렇게 성장하곤 했다. 그런 아이들에게 가르쳐야 할 것과 금지할 것을 나누기 시작한 것이 바로 아동의 탄생이다. 필립 아리에스가 1960년대 <아동의 탄생>에서 말했듯이, 우리가 보호해야 할 대상으로서 보는 ‘아동’은 사회적 필요에 의해 발명되었다.

그러나 한편, 규율은 급속히 훈계, 사랑의 매라는 이름의 폭력으로 변질되었다. 최근 우리 사회에선 거의 사라지다시피 했지만 고작 10여년 전만 하더라도 학교와 매는 떼놓을 수 없는 관계였다. 학교에서 매를 맞고 오면 부모님는 으레 자식을 혼냈다. 매는 결국 학교를 군대 비슷한 위계적 사회로 만들었고, 사실상 전근대 시절 최하층 신분의 사람들에게나 통용되던 매질과 유사 투옥, 체벌이 허용됐다. 놀랍게도, 얼마 전까지만 해도 말이다.

중요한 것은 더 이상 학교에서의 체벌이 당연하게 여겨지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우리의 무의식 속에 새겨진 계부, 계모의 학대도 더 이상 자연스럽지는 않다. 그리고 이는 친부모의 학대 역시 사생활 영역이 아니라는 것을 의미한다. 학대는 친부모도 수없이 자행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니, 친부모의 학대야말로 아주 오래된 비밀이다. 오죽하면, 구전 동화 속 계모가 사실은 친모라고 하지 않나?

아동학대 사건이 발생할 때마다 사회는 대경실색한다. 하지만 어느새 복잡다단한 세상일에 밀려 다시 아동학대 문제는 사생활의 영역으로 괄호가 쳐진다. 사생활 존중이 좀처럼 어려운 나라임에도 불구하고 자녀 양육만큼은 가정 내부의 사생활로 취급된다. 하지만 이는 까다로운 아동 문제를 철저히 ‘가족과 가정’ 내부의 것으로 돌린 것에 불과하다. 그건 무관심이자 포기일 뿐이다.

칸영화제 최연소 남우주연상의 기록을 가진 영화 <아무도 모른다>에는 공교롭게도 트렁크에 담겨 이동하는 아이가 등장한다. 자기밖에 모르는 엄마는 아이가 넷이면 집을 구하는 데 불리하니, 작은 아이들을 트렁크에 넣고 이사를 다닌다. 그것도 잠시, 유일한 양육자인 엄마는 이내 아이들을 방임한 채, 집을 비우고 떠나 버린다. 그렇게 옆집에 사는지도 몰랐던 아이는 죽어서도 죽었는지 아무도 모르게 세상에서 지워진다. 영화 속 아이들은 한낮의 거리를 헤매지만, 아무도 그 존재를 모른다. 아무도 모르는 사이 아이들이 자꾸만 다친다.

아동이 역사적 발명품이라면 아동의 학대 역시 역사적 개념이다. 개인의 책임이나 부모의 본능에만 맡길 수 없는 문제인 셈이다. 영화와 문학은 증언이 될 수는 있지만 해결책은 될 수 없다. 해결에는 훨씬 더 실효성 있는 강제력을 동원해야 한다. 19세기 유럽 문학 속 아동학대가 고아들에 대한 사회적 육아의 문제를 공론화했다면 우리는 지금 가족 내에서 아동의 자리와 학대의 문제를 사회적으로 고민해야만 한다. 한낮의 아이도 우리의 아이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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