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말 그 이후

2020.07.17 03:00 입력 2020.07.17 03:01 수정

<부산행>의 적이 질주하는 좀비였다면, <반도>의 악은 살아남은 자들이다. 이질적 침략자보다 내부의 생존자들이 더 무서운 세계, 이는 미래가 아닌 현실이 더 문제적이라는 이야기로 읽힌다. 영화 <반도> 스틸컷.

<부산행>의 적이 질주하는 좀비였다면, <반도>의 악은 살아남은 자들이다. 이질적 침략자보다 내부의 생존자들이 더 무서운 세계, 이는 미래가 아닌 현실이 더 문제적이라는 이야기로 읽힌다. 영화 <반도> 스틸컷.

묵시록을 지칭하는 아포칼립스는 ‘폭로’라는 어원을 가지고 있다. 묵시록에는 언제나 세상의 끝, 종말이 등장한다. 전염병이 돌 수도 있고, 돌이킬 수 없는 전쟁이 일어나기도 하고 때로는 지진이나 화산폭발 같은 자연재해가 발생하기도 한다. 종말과 함께 폭로되는 세상의 살풍경은 곧 신의 언어로 해석되기도 한다. 종말 역시도 신의 메시지라는 의미이다. 종교적 언어가 세상을 지배할 땐, 종말은 말 그대로 끝이었다.

강유정 강남대 교수·영화평론가

강유정 강남대 교수·영화평론가

그러나 점점 사람들은 종말 그 이후를 상상하기 시작했다. 어떤 종말이 오느냐에 대한 관심 이후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남은 사람들의 이야기에 상상을 보태기 시작한 것이다. 리처드 매드슨의 <나는 전설이다>나 코맥 매카시의 소설 <더 로드> 같은 작품들이 바로 포스트 아포칼립스 서사라고 말할 수 있다. <부산행> 4년 이후 공개되는 <반도> 역시 포스트 아포칼립스 서사이다. 좀비가 창궐한 4년 전 대한민국이 일종의 종말론의 세계였다면 <반도>는 그날, 이후인 셈이다.

종말론도 워낙 허구이지만 포스트 아포칼립스 서사의 바탕은 상상일 수밖에 없다. 세상살이는 늘 지옥처럼 견디기 어렵지만 종말은 언제나 미래적 상황이다. 그래서인지 종말은 마치 구원처럼 묘사되기도 한다.

그렇다면 종말 그 이후의 삶은 어떨까? 최근의 포스트 아포칼립스 서사 중에 기념비적인 작품으로 여겨지는 <매드맥스: 분노의 도로>의 경우 물과 자원이 고갈된 미래 사회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이모탄이라 불리는 사이비 교주가 세상을 이끌고, 목적도 미래도 없는 젊은이들은 스스로를 산화해 얻어낸 에너지로 하루하루를 버틴다.

<매드맥스>는 어떤 신념에 맹목적으로 매달려 삶을 버티려는 젊은이들의 기형적 생존을 영화적 우화로 표현해냈다. 묵시록이 상상한 미래라고는 하지만 그것이 보여주는 진실은 바로 지금, 우리의 현실이라고 할 수 있다. <매드맥스>에 묘사된 삶도 우리의 것과는 다르긴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맹목성과 유희성, 폭력성은 닮은 바가 많았다.

애당초 <부산행>이 한국에서 1000만명 이상의 관객을 동원할 수 있었던 동력에도 바로 이 현실성이 있다. 좀비는 세상에 없고, 급속한 전염성을 가진 좀비 바이러스도 있을 리 없지만 부산행 KTX 객차에 올라탄 인간군상들은 결국 2016년 대한민국, 여기 삶의 압축이었다. 특히 눈길을 끈 것은 매우 평범한 중산층 시민으로 보였던 ‘권 상무’였다. 나름 대기업 상무라며 발언권을 주장하고 판단력을 앞세우던 그는 자기 하나 살아남기 위해 온갖 기회주의적 악행을 서슴지 않는다. 각자도생의 지옥이라곤 하지만 ‘권’은 말 그대로 비윤리적이고 부도덕하게 이기적 선택만 일삼는다. 말하자면, 그는 우리 사회 중산층 및 기득권층이 가진 패륜성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캐릭터였다.

언제나 그렇듯 선은 전형적이고 악이 입체적이다. 결국 묵시록이 세상을 보여주는 만화경이라면 그 세계는 통시적 미덕인 선보다는 동시대적 패착인 악을 통해 드러날 확률이 높다. 그렇다면 포스트 아포칼립스 서사인 <반도>에서 더 유심히 들여다봐야 할 것은 선이 아니라 악의 구체성일지도 모르겠다.

<반도>에도 악이 존재한다. 그런데 이 악인들이 예상 가능한 악의 스펙트럼 안에 있다. 현실적이기보다 관념적인데, 이 악인들은 조제 사라마구의 <눈먼 자들의 도시>에 등장하는 생존자 무리나 <매드맥스>에 넘쳐나던 기형적 생존자들과 닮아 있기도 하다. 우선 약육강식의 세상이란 점에서 생존자의 성격은 짐작 가능하다. 여기에 하나 더 특이한 점이 있다면 이 생존자 무리가 성인, 남성으로만 이뤄진 집단으로 묘사된다는 사실이다.

사실상 성인 남성만으로 이뤄진 집단은 군대이다. 아니나 다를까, 631부대로 통칭되는 생존자 무리는 군대처럼 운영되고 유지된다. 그래서인지 이 무리 안에는 아동도, 노인도, 여성도 없다. 이들은 이 부대로부터 동떨어진 세계, 또 다른 게토에 숨어 지낸다. 성인 남성 생존자들이 기약 없는 지옥 속에서 자기 파괴적 유희에 몰두하고 있다면 아이와 노인, 여성은 좀비와 군대로부터 숨는 이중적 도피 생활을 이어가는 것이다.

<부산행>의 적이 질주하는 좀비였다면, <반도>의 악과 적은 좀비가 아닌 살아남은 자들이다. 철도의 직선성과 고속열차의 가속성 위에 <부산행>이 종말을 향해 질주하는 힘을 가졌다면, <반도>의 생존자들은 최종 도착지도 예정 시각도 없이 주어진 시간 앞에 늘어져 있다. 좀비와 공생하며 살아가는 <반도>의 인물들에게서 정말 두려운 것은 하릴없는 시간과 희망 없는 생존이다. 이질적 침략자보다 내부의 생존자들이 더 무서운 세계, 희망 없는 미래가 문 밖의 좀비보다 더 무서운 현실. 좀비가 창궐하는 <반도>의 풍경보다 서로의 존재가 더 야만적이고 폭력적이라면 그건 미래가 아닌 현실이 더 문제적이라는 이야기일 수도 있다. 좀비가 창궐한 <반도>보다 지금, 여기, 우리의 삶이 더 복잡하고 답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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