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자가 되지 않도록

2020.09.26 03:00 입력 2020.09.26 03:02 수정

“이제부터 하는 이야기는 줄곧 비밀로 해두었던 거예요. 그러니까 아무도 모릅니다. 여러분도 아무한테도 떠들어대지 않도록 조심해야 돼요. 알겠지요?”

김지은 서울예대 문예학부 교수 아동문학평론가

김지은 서울예대 문예학부 교수 아동문학평론가

이야기는 이렇게 시작한다. 어느 날 거인이 되어버린 아이, 알렉산더의 이야기다. 알렉산더는 누나와 형이 독감에 걸려서 자가격리 중이었기 때문에 폭설이 내린 웨일스의 삼림을 지나 학교까지 혼자 걸어가야 했다. 숲에서 길을 잃는 바람에 걷고 또 걸어도 어디가 어디인지 알 수 없었다. 그는 “저 키 큰 나무들 위로 목을 내밀고 주위를 빙 둘러볼 수 있을 만큼 제 몸이 커진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그러면 어느 쪽으로 가야 할지 알겠지요?”라고 간절하게 빌었고 때마침 숲을 지나던 마법사가 그 소원을 듣는다. 알렉산더는 온몸 속을 콕콕 찌르는 것 같은 이상한 기분을 느낀다. 잠시 후 자신이 나무 위로 몸을 쑥 내밀고 먼 곳을 보고 있다는 걸 알게 된다. 거인이 된 것이다.

프랭크 허먼이 1965년에 쓴 동화 <거인, 알렉산더>에서 주인공은 생존을 위해 성장의 시간을 훌쩍 뛰어넘어 버리는 아이로 나온다. 알렉산더는 눈 속에서 살아남은 그날 이후 가족과 함께 지낼 필요가 없었고 그럴 수도 없었다. 키가 이미 18m나 되었기 때문이다. 바다 근처의 헌 창고를 빌려 독립한 알렉산더는 긴 팔과 다리의 힘으로 갯벌에 빠진 배를 들어올리는 일을 한다. 트래펄가 광장의 동상에 쌓인 새똥 청소 전문가로 초빙되기도 한다. 거인 알렉산더가 항상 걱정하는 것은 어디선가 자신처럼 혼자가 되었을지 모를 이웃 어린이들이다. 알렉산더는 어린 친구들이 놀러오면 식사를 대접했는데 손이 커서 달걀 1728개를 넣어 만든 푸딩도 있었다고 한다.

상상 밖의 시련을 만나고, 그 안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거인처럼 되어야 했던 어린이의 이야기는 우리 창작동화에도 많다. 김남중의 동화 <크로마뇽인은 동굴에 산다>에는 어른 없는 집에서 남동생을 돌보는 누나가 나온다. 누나는 동생에게 “우리는 크로마뇽인이야. 지금 동굴 놀이를 하고 있는 거야”라고 말한다. 선사시대 어른들처럼 멧돼지 사냥법과 요리법을 떠올려가면서 동생과 둘이서 아슬아슬한 굶주림의 시간을 버틴다. 누나는 동생을 위해 라이터를 켠다. 크로마뇽인들처럼 불을 켤 줄 아는 누나는 동생에게 자신을 지켜주는 거인처럼 보였을 것이다. 누나는 결코 거인이 아니고, 자신도 겁이 나지만, 동생을 지키려고 애쓴다. 그런가하면 전미화 작가는 어린이에게 거인의 역할을 맡기는 사회를 비판하며 믿음직한 어른은 어디 있는가 묻는다. 그림책 <오빠와 손잡고>에 등장하는 오빠는 동생을 위해서라면 고등어도 벌떡 일어나 춤을 추게 하는 재치 넘치는 어린이다. 그러나 둘이서만 보내는 하루는 길고 오빠는 빨리 어른이 되겠다고 동생에게 말한다. 무서운 사람들이 가끔 어른 없는 집에 들이닥치기 때문이다. 어린이가 다른 어린이를 지키기 위해 어서 어른이 되겠다고 말하게 만드는 사회는 부끄럽고 무책임하다.

심리학에 ‘부모화(parentification)’라는 용어가 있다. 자녀가 오히려 부모처럼 행동하도록 강요받는, 서로의 역할이 뒤바뀌는 상황을 말한다. 방치된 가운데 거인이 되어서라도 살아남으려고 애쓰는 어린이들은 동화 속에도 있고 현실에도 있다. 아이들끼리 고생하더니 그래도 의젓하게 잘 자랐다는 말은 얼마나 비겁한가. 코로나19 사태 이후 가정폭력과 아동학대가 급증하고 있지만 비대면 환경이라 발견은 더 어렵다. 알렉산더는 폭설에서 살아남기 위해 일찍 어른이, 거인이 되었지만 그 뒤로 아이들의 소리에 평생 귀 기울이며 살아간다. “친절하고 조용하고 작은” 아이였던 시절의 고통을 잊지 않는 것이다. 유례없는 재난에 어린이들이 고립되어 있다. 혼자가 되지 않도록 너도나도 구조대원이 되어야 한다. 위기 이후에 움직이면 그때는 늦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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