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음악의 장소에서

2020.09.19 03:00 입력 2020.09.19 03:01 수정

음반과 축음기가 세상에 처음 등장한 것은 19세기 말이었다. 음악을 다른 시공간으로 내보낼 수 있게 해준 이 발명품은 인류의 음악문화에 유례없는 지각변동을 가져왔다. 하지만 이들이 처음부터 수월하게 우리 삶의 일부로 자리한 것은 아니었다. 최초의 영화였던 뤼미에르 형제의 <열차의 도착>이 처음 상영됐을 때 사람들이 기겁해서 도망쳤다는 전설 같은 일화까진 아니지만, 음반과 축음기는 사람들에게 적지 않은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예컨대 공연은 라이브로 이루어지는 입체적인 시청각 경험인 데 반해 음반에 담긴 것은 통조림 음악이라거나 반쪽짜리 음악이라는 식이었다.

신예슬 음악평론가

신예슬 음악평론가

음악사를 공부할 때 내게 가장 흥미로웠던 것은 음악의 가치나 존재 조건이 바뀌던 시기에 벌어진 일들이었다. 이런 시기에는 사람들이 암암리에 믿어왔던 음악에 대한 생각들이 수면 위로 떠오르고, 서로 맞부딪히며, 새로운 형태의 음악들이 만들어졌다. 여러 변환기 중에서도 내가 가장 많이 상상해본 시기는 음반이 탄생하던 무렵이었다. 당시 어떤 이들은 음반을 듣고 오싹함을 느꼈다고 한다. 어떤 이들은 죽은 자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는 사실을 생경하게 받아들였다고도 한다. 이것이 ‘음반’이라는 사실에 놀라워했던 옛사람들의 마음을 느껴보고 싶었다. 그들은 기쁨 섞인 놀라움과 두려움 섞인 당혹스러움, 찬사와 비판, 음악의 과거와 미래 같은 것들을 수도 없이 뇌리에 떠올렸을 것이다.

내게는 그 정도로 큰 변환기를 경험할 기회가 없을 줄 알았으나, 최근 음악문화는 꼬박 반년간 끊임없는 지각변동과 그에 따른 체질개선의 시기를 겪고 있다. 축음기 같은 신기한 발명품은 없으나 코로나로 인한 ‘공연의 암흑기’가 장기화되고 있기 때문이다. 모든 것은 당분간 멈추어야 한다. 그러나 쇼는 계속되어야 한다. 음악가와 공연예술가들은 유일한 안전지대처럼 보이는 온라인으로 이주해 그곳의 언어와 문법을 익혀가고 있다. 일찍부터 그 터전에 오갔던 사람들은 조금 더 수월하게 적응하고 있는 듯하다.

활기를 띤 공연장에 방문했던 것이 반년도 더 지난 탓인지, 처음에는 도무지 몰입하기 힘들었던 온라인 공연이 내게도 한층 자연스럽게 느껴진다. 처음엔 객석의 미묘한 기류도, 박수도 없이 카메라가 보여주는 장면만 따라가며 공연을 보는 경험이 너무 시시해서 견디기가 어려웠다. 하지만 꽤 재밌는 온라인 공연을 많이 본 덕인지 어느 순간 인식이 뒤집혔다. 사람이 없는 대자연 속에서 DJ셋을 선보이거나, 더없이 잘 꾸며진 스튜디오에서 온갖 악기를 늘어놓고 차분하게 음악을 들려주거나, 미술관 곳곳을 탐험하며 사무실과 옥상, 전시장 안에서 각자의 음악을 선보이는 흥미진진한 공연을 보다 보니 반대로 일전의 공연들이 폐쇄적이고 천편일률적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이르렀다.

음악에서 보고 듣기를 소망하는 것, 기대하는 것이 이전과는 사뭇 달라지고 있음을 느낀다. 처음에는 사라진 무대와 현장성만을 아쉬워했었다. 이 중단조치가 임시적일 것이라 생각하며 공연문화가 원상 복구되기를 기대해야 할지, 혹은 시대가 바뀌었다는 것을 납득하며 온라인에 마음을 쏟아야 할지 고민하던 시절도 길었다. 그러나 이제는 공연이 더 이상 무대에서 이루어져야만 할 필요도, 이미지의 현장과 소리의 현장이 같을 필요도 없다는 마음이다. 음반이 기록이라는 가치를 어느 순간 넘어선 것처럼 온라인 공연 또한 이전의 공연 개념을 훌쩍 넘어설 것이란 생각이 든다.

처음 축음기와 음반이 등장해 음악문화를 뒤흔들기 시작했을 무렵, 당시 음악을 업으로 삼던 이들은 어떤 태도로 시간을 보냈을까. 낯선 것을 보고 놀라서 도망치지 않고, 유연한 마음으로 어떤 역사가 시작되는 순간을 낱낱이 지켜보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 소망하며, 새로운 음악의 장소를 탐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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