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대한의 기적을 어린이에게

반짝거리는 불빛을 보면 두근거린다. 작은 일에 눈시울이 촉촉해지기도 하는데 찬바람 때문만은 아니다. 실수에 조금 더 너그러워진다. 한 해의 끝인 12월은, 크리스마스는 그런 분위기를 가지고 있다. 이즈음이면 다들 불행보다 다행을 기억하면서 연말을 맞이한다.

크리스마스를 다행으로 만들고자 누구보다 노력하는 사람들은 어린이다. 어린이는 꿈이 많지만 그 꿈은 대개 “다음에 해줄게”라는 아쉬운 말로 마무리된다. 그런데 크리스마스는 다르다. 진짜가 아닐 거라고 생각한 일이 진짜가 되는 것, 이것이 크리스마스가 어린이에게 주는 기대감이다. 1년은 365일인데 하루쯤 기적을 바라는 날이 있어도 좋지 않겠는가.

하지만 어린이가 바란 원대한 기적은 밤사이에 소박한 선물이 되어 머리맡에 놓인다. 그것이 무엇이든 어린이는 최선을 다해 수긍한다. “내가 너무 커다란 소원을 빌었던 거야. 지구에서 가장 바쁜 산타 할아버지에겐 원래부터 힘든 일이었어. 난 괜찮아요. 산타할아버지!” 머리맡에 선물이 없으면 “썰매가 고장 났나? 아프면 안 돼요, 할아버지! 선물은 내년에 받으면 되니까. 하지만 내년에는 꼭 내가 원하는 그걸 가져다주셔야 해요. 알죠?”라는 식으로 마음을 정리한다.

산타할아버지와 어린이의 대타협이 성공하는 이유는 기적을 믿고 싶은 어린이가 산타의 변명까지 대신 작성하겠다는 아량을 가지고 기적의 실현을 유보하기 때문이다. 이 험한 세상에서 한갓 어린이의 소원이 이루어지기란 얼마나 힘든지 어린이들은 단 몇해의 인생 경험으로도 눈치챈다. 어른들의 한숨에서, 딱딱한 목소리의 복잡한 뉴스에서 감지한다. 크리스마스의 기적까지 포기하는 일은 선물을 받지 못하는 것보다 백 배는 더 아픈 일이기 때문에 어린이는 “그날만큼은 바라면 진짜가 된다”는 기적을 유예하고 보존하고자 애쓴다.

크리스마스의 기적을 잘 그려낸 두 편의 동화가 있다. 하나는 1922년에 마저리 윌리엄스가 쓴 ‘벨벳 토끼’이다. 한 아이가 크리스마스 선물로 벨벳 토끼 인형을 받는다. 토끼를 사랑하던 아이는 다른 멋진 장난감을 갖게 되자 침대맡의 토끼 인형을 잊고 만다. 어느 날 아이는 성홍열에 걸리고 벨벳 토끼 인형은 밤을 새워 아이 곁을 지킨다. 아이는 벨벳 토끼를 껴안고 무서운 성홍열을 떨쳐낸다. 그러나 아이가 병상에서 일어나자 어른들은 균이 묻어 있는 그 토끼를 불태워야 한다고 빼앗아버린다. 아이는 펑펑 울고 벨벳 토끼도 눈물 없이 흐느껴 운다. 그때 요정이 크리스마스의 정신을 말해준다. “정말로 사랑한다면 진짜가 될 수 있어.” 아이는 토끼에게 입맞춤을 한다.

결국 벨벳 토끼는 아이의 장난감과 함께 불태워진다. 이듬해 봄 아이는 뜰에서 어떤 토끼를 발견하고 함께 논다. 그 토끼가 사랑했던 벨벳 토끼라는 걸 아이는 모른다. 하지만 벨벳 토끼는 안다. 진짜로 사랑했기 때문에 이루어진 단 한 번의 기적이 자신이라는 사실을.

또 한 편은 지안 작가가 쓴 2023년의 동화 ‘크리스마스에는 눈꽃펑펑치킨을!’이다. 작품 속 다운이 남매는 오랫동안 모은 치킨쿠폰 아홉 장을 갖고 있으며 크리스마스에는 눈꽃펑펑치킨을 먹고 싶다. 딱 한 장이 모자라는 상황에서 다운이가 분리수거장에 버려진 쿠폰 한 장을 기적처럼 발견한다. 그러나 그렇게 채운 열 장의 쿠폰으로 주문전화를 걸고 나서야 쿠폰은 평일에만 쓸 수 있으며 기본 치킨만 된다는 걸 알게 된다. 다운이 남매는 크리스마스에 눈꽃펑펑치킨을 먹을 수 있을까?

다운이 남매의 소원은 기적처럼, 기적보다 더 근사하게 이루어지는데 그걸 해내는 인물들은 산타가 아니다. 간절히 바라면 진짜가 될 거라는 어린이의 마음을 지나치지 못하는 이웃들이다. 기적을 미루지 않게 하는 건 가까운 어른의 관심이다. 올해도 많은 어린이가 기적을 기도할 것이다. 그들이 진짜를 만났으면 좋겠다. 그것이 무엇이든 최대한.

김지은 서울예대 문예학부 교수 아동문학평론가

김지은 서울예대 문예학부 교수 아동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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