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BTI로 과학자 약 올리기

2020.11.11 03:00 입력 2020.11.11 03:03 수정

저명한 과학자이자, 친애하는 페이스북 친구가 성격 유형 검사인 MBTI 열풍을 걱정하는 글을 포스팅했다. MBTI가 과학적 근거가 빈약한 지표이기 때문이라 했다. MBTI는 이분법으로 나눠(I/E, S/N, F/T, P/J) 지표를 정하는데, 이것으론 정확한 결과를 도출하기 어렵다. 예컨대 I 성향이 51%인 사람과 90%인 사람 모두 I로 분류돼버리는 게 정확한가? 이처럼 이분법으로 나누는 방식은 우리 성격이 스펙트럼의 한 지점에 위치하고, 그 지점이 언제든 변할 수 있다는 사실을 가릴 수 있다는 내용이었다.

최서윤 작가

최서윤 작가

그밖에도 많은 문제점이 지적됐고, 문제의식에 동조하는 댓글이 줄줄이 달렸다. 그중엔 MBTI에 진심인 사람들을 비웃으며 우월감을 전시하는 댓글도 있었다. 순간 충동을 느꼈다. 이해하지 못한 척 엉뚱한 댓글을 달아 약 올리고 싶은 충동이었다. MBTI 검사가 ‘과학적’이지 않다는 데 동의하지만, 그럼에도 나름의 효용이 있다고 생각하기에 그곳의 지배적 분위기에 반항하고 싶었던 것이다.

정말이지 MBTI가 유행이구나, 느낀 일이 있었다. 올해 젊은 예술가들이 모여 지역 문화·예술을 위해 협업하는 프로젝트에 참여했다. 대부분이 처음 만나는 자리. 그 자리에서 각자의 스마트폰으로 인터넷 무료 MBTI 검사를 진행하고 바로 결과를 공유했다.

그 경험이 썩 나쁘지 않았다. 구성원 모두 검사 결과가 달랐는데, 이를 알게 되자 좀 더 관용적 태도를 갖게 됐다. ‘이 사람은 나와 이렇게 다른 사람이구나. 내게 익숙지 않은 표현 방식과 리듬도 우리가 다르기 때문이구나’라고 이해한 덕이다. 각자의 유형을 설명하는 글을 함께 읽고 얘기 나누는 시간도 즐거웠다.

이만하면 ‘혈액형의 시대’에 비해 진보한 것 아닌가? MBTI는 적어도 성격과 관계는 있어 보인다. 그 사람이 직접 답한 내용이므로, 그가 생각하는 자기 자신이라든지 그 사람의 경향성을 가늠할 수 있다. 반면 혈액형은? 정말이지 첫 만남에서 혈액형 묻는 일을 이해할 수 없다. 피 모자랄 때 수혈해주려는 게 아니면 도대체 왜 묻지? 혈액형을 들은 뒤 “역시” 혹은 “의외네요”라고 말하며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사람을 볼 때마다 뒷목 잡게 됐다. 이런 경험이 있었기에, MBTI에 대해 글 쓴 과학자를 약 올릴 수 있는 효과적인 댓글을 안다. “역시, 이런 글 쓰신 것 보니 INTP시죠?”

MBTI 활용의 나쁜 예다. 누군가를 함부로 추측하고 딱지 붙이는 것 말이다. 그밖에 회사나 학교가 MBTI 검사를 위해 적잖은 예산을 쓰고, MBTI 검사 회사가 수백억원의 매출을 올리는 일 역시 문제가 있다고 생각한다. MBTI를 진로 선택에 진지하게 참고하는 일도 적절치 않아 보인다. 중요한 일에는 좀 더 과학적인 근거를 참고하자.

MBTI는 처음 만난 사이 어색함을 깨부수는 용도 정도가 적당한 것 같다. 그래도, 더 좋은 대화를 향한 진보는 멈추지 않기를. 서로의 성격과 취향과 가치관에 대해 알 수 있는 더욱 흥미로운 방법들에 대해 계속 고민하고 싶다. 무엇보다, 상대를 유형화하는 것보다 고유한 존재로 대하는 것이 그를 더 존중하는 길임을 잊지 않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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