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이 다 지나가고 종강 시즌이 왔다. 마지막 수업을 하기 위해 교실에 입장하며 아이들을 바라보았다. 내년에 다시 만날 아이도 있지만 다시 못 볼 아이도 있다. 우리는 모두가 처음 맞닥뜨린 코로나 시대에 같이 진입한 이들이다. 온라인과 오프라인을 어수선하게 넘나들며 함께 쩔쩔매본 사이다. 소규모 교실에서 거리를 두고 마주한 아이들의 얼굴은 마스크로 반 넘게 가려져있다. 그래도 나는 그들 얼굴의 아래쪽을 잘 상상할 수 있다. 줌 화면을 통해서도 보았고, 가끔씩 마스크를 내리고 물을 마실 때에도 보았으니까. 마스크를 쓰고 처음 만났던 학기 초에는 표정을 읽을 수 없어 답답했다. 내가 건넨 말에 웃었는지 안 웃었는지, 표정이 굳었는지 안 굳었는지 알 수 없어 막막했다.

이슬아‘일간 이슬아’ 발행인 글쓰기 교사

이슬아‘일간 이슬아’ 발행인 글쓰기 교사

1년이 흐른 지금은 그 표정을 조금 알 것 같다. 마스크 위 두 눈과 양 눈썹을 유심히 보게 되어서다. 아이들도, 나도 상대방 얼굴의 윗부분을 보는 안목이 1년 사이 발달한 듯하다. 중요한 이야기를 할 때 눈을 또렷하게 뜨고, 이해가 되지 않을 때 눈살을 살짝 찌푸리며 고개를 갸우뚱하고, 공감할 때 고개를 크게 끄덕끄덕하는 동작들 덕분이다. 얼굴의 움직임만으로 충분치 않을 때에는 다양한 손짓을 곁들이기도 했다.

학기 초에 비해 아이들과 나는 제스처가 풍부해지고 목소리도 커졌다. 마스크에 가려진 채로도 잘 전하고 싶고 잘 알아듣고 싶기 때문이었다. 표정과 손짓이 적극적으로 바뀌는 와중에 아이들의 글도 달라졌다. 세부 정보가 점점 많아지고 등장인물의 수도 늘어났다. 시간이 흐를수록 아이들은 자신의 더 많은 부분을 글쓰기 수업에 흔쾌히 내어준다. 나는 그 사실에 감격하며 일한다. 그러나 아이들이 쓰지 않은 이야기는 아직도 많고 많을 것이다. 종강 수업에서 나는 칠판에 다음과 같은 문장을 적었다. 김행숙 시인의 시 ‘눈과 눈’의 한 구절이었다.

“너는 눈이 좋구나. 조심하렴. 더 많이 보는 눈은 비밀을 가지게 된다.”

아이들은 내가 쓴 문장을 받아적었다. 나는 말했다. 더 많이 보는 사람의 황홀과 고통에 대해. 그리고 비밀을 가진 사람의 불안과 아름다움에 대해. 우리를 괴롭히는 동시에 구원하기도 할 다양한 비밀들에 대해. 부디 글쓰기라는 작업이, 그 비밀을 혼자 품느라 너무 크게 다치지 않도록 도왔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다시 못 볼 수도 있는 아이들에게 하나의 이야기만을 전해야 한다면 이 말을 하고 싶었다. 글쓰기를 통해 스스로를 지킬 수 있다는 말. 그러다보면 더 많은 걸 수호할 수도 있게 된다는 말.

세월이 흐른 뒤에도 그들은 2020년을 자주 회자할 것이다. 격변하는 시대를 살아왔다고, 어쩌면 2020년부터 시작이었다고 말할 것이다. 아이들은 이제 스무 살을 앞두고 있고 나는 서른 살을 앞두고 있다. 성인이 되어 다시 만나면 우리는 그야말로 동료다. 나의 스승 ‘어딘’과 내가 그렇게 되었듯이 말이다. 그들은 내가 상상도 못했던 희망을 발명할 것이다. 나는 어른이 될수록 절망할 염치가 사라질 테고 그들이 발명한 희망을 서포트하기 위해 애쓸 것이다.

이 지면을 통해 글쓰기 수업에서 만난 나의 어린 스승들에 대해 많은 글을 썼다. 그 글들을 모아 <부지런한 사랑>이라는 책을 만들었다. 새해에는 글쓰기로 더 많은 타자와 장소를 비추고 싶다. 글이 해내는 아름다운 성취를 계속해서 갈고닦고 싶다. 내가 계속한다는 게 나뿐만 아니라 아이들에게도 희망이었으면 좋겠다. 그들과 함께 더 많은 것을 볼 용기를 낸다.

추천기사

바로가기 링크 설명

화제의 추천 정보

    오늘의 인기 정보

      추천 이슈

      이 시각 포토 정보

      내 뉴스플리에 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