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리상담사의 자격, 그리고 소명

“연세대 심리학과 권수영 교수 나오셨습니다.” 여러 해 전 한 라디오 방송에 패널로 출연한 나를 사회자는 이렇게 소개했다. 다른 방송에서도 이런 실수는 여러 차례 반복되었다. 내가 신학대학원 소속 상담학 교수라고 정정하면 다들 고개를 갸우뚱하곤 했다. 일반인들은 인간의 마음과 상담에 대한 강의를 하는 교수라면 당연히 심리학 전공자라고 여길 만하다.

권수영 연세대 연합신학대학원 상담학 교수

권수영 연세대 연합신학대학원 상담학 교수

하지만 최초로 ‘심리상담’ 서비스를 미국에 소개한 칼 로저스는 심리학 신봉자가 아니었다. 농대에서 과학적 농법을 배워 농장경영자가 되고자 했던 그는 대학 2학년 때 목회자로 소명을 받았다고 확신하고 역사학으로 전공을 바꿨다. 대학졸업 직후 그는 뉴욕 유니온 신학대학원에 입학했다. 첫해 여름엔 한 작은 교회의 설교목사로 일했다. 유독 설교하는 일에 큰 부담을 느꼈던 그는 신학생 2학년 때 우연히 근처 컬럼비아대 사범대학에서 임상심리학 과목을 수강하게 된다. 로저스는 신학을 떠나 보다 과학적으로 인간의 마음을 치료하는 전공으로 진로를 바꾸기로 결심했다.

로저스는 컬럼비아 사범대학에서 9~13세 아동의 성격적응을 측정하는 검사를 개발하는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당시 그는 심리학의 과학적 접근이 치료에 유용하게 적용될 수 있으리라 굳게 믿었다. 첫 전공서적인 <문제아동의 임상치료>를 저술하고 오하이오주립대 교수직을 시작했다. 하지만 그에게 변화가 시작되었다. 당시 과학적 심리검사에 초점을 둔 지시적 접근과는 반대되는 방향을 제시한 것이다. 1942년 그의 두 번째 저서에서는 치료의 새로운 개념으로 심리상담 서비스를 소개했다. ‘환자’ 대신 ‘내담자’(client)라는 용어가 처음 등장했다. 시카고대학 교수로 옮겨 저술한 세 번째 책 <내담자 중심 치료>는 수많은 독자층을 확보했다.

로저스 평전을 쓴 한 작가는 로저스가 심리학자들과 정신의학 분야와 협력하여 진행해보려던 ‘내담자 중심 치료’의 꿈은 결코 이루어지지 못했다고 기록한다. 결국 대학을 떠난 그는 캘리포니아의 한 연구소에서 치료공동체를 넘어 보다 광범위한 인간 치유에 대한 연구와 저술로 명성을 얻기 시작했다. 어느새 그에게 ‘내담자 중심’이란 용어는 ‘인간 중심’으로 바뀌었고, 세계 공동체가 직면한 문제에까지 적용되었다. 문화 및 인종의 경계를 넘나드는 영향력을 가지게 된 그는 1987년 노벨 평화상 후보로 지명되기도 했다.

로저스가 심리상담 서비스의 주창자로 추앙받는 이유는 뭘까? 그가 과학적인 접근으로 특별한 치료법을 개발해서가 아니었으리라. 성직의 소명을 받았던 그는 평생 인간 내면의 신성(神性)을 민감하게 감지하지 않았을까? 그래서 그는 문제아동을 환자로 보지 않고 내담자로 부르며, 각 존재의 고유함과 무한한 가치를 발견하는 접근법을 고집했을지 모른다. 어쩌면 인간의 마음을 살피고 치유하려는 전문가에게 가장 필요한 자격은 인간에 대한 뜨거운 사랑과 자신이 하는 일에 대한 ‘소명’이다. 인간의 신체적·사회적·영적인 생명을 다루는 전문직종들, 즉 의료인·법조인·성직자들이 모두 소명과 윤리의식이 없다면 가장 위험한 직군이 되는 것과 같은 이치다.

나는 2014년부터 8년째 마음을 치유하는 심리상담사 직군을 위한 법제화와 자격관리를 국가가 주도하라는 주장을 해왔다. 심리상담사 모법(母法)이 없다보니 소명과 윤리의식이 결여된 일부 민간자격 취득자들이 국민의 마음 건강을 해치는 일들이 발생하곤 했다. 최근 보건복지부가 발주한 심리서비스법 연구가 공개되면서 국내 상담계가 시끄럽다. 심리학 전공자들만이 심리상담을 할 수 있다는 자격 조항 때문에 상담분야 교수 1500여명이 반대 성명서를 내고, 심리상담사들은 청와대 국민청원까지 올렸다. 무려 70여년이 지났건만 이런 모습을 보고 로저스는 얼마나 깊은 한숨을 지을지 가슴이 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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