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전정복의 시대

2021.05.25 03:00 입력 2021.05.25 03:03 수정

“♪솔솔도레 미파미도 솔파미도레 (중략) 솔피솔미 솔라솔피솔미♪”

해마다 3월쯤부터 이맘때까지 가곡 ‘봄이 오면’의 곡조가 입가를 맴돈다. 그것도 ‘봄이 오면/ 산에 들에/ 진달래 피네’라는 노랫말이 아니라 꼭 계이름으로 흥얼거리게 된다. 위에 써놓은 계이름을 자세히 보면 ‘피’라고 적힌 부분이 있다. 내림마장조인 노래의 해당 음에 ‘제자리표(●)’가 붙어 있어 ‘피(파#)’로 부르지만, 이런 설명은 사족이다. 무조건 외웠기에 지금도 ‘솔피솔미’부터 반사적으로 튀어나온다.

정환보 산업부 차장

정환보 산업부 차장

1990년대 초반 고입 경쟁이 특히 치열했던 지방의 한 중학교 3학년 교실 풍경이 그랬다. 유난히 코를 킁킁거리던 음악 선생님은 3월 첫 수업부터 연합고사(고입선발고사) 전날까지 3학년 <음악> 교과서에 실린 모든 곡을 계이름으로 주구장창 부르게 했다. ‘솔페지오(계명창)’라는 서양음악 교습법이라는데, 당시 학생들에게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200점 만점의 연합고사에서 1점짜리 딱 한 문제가 어디서 출제될지 모르니 1년 내내 목이 터져라 ‘솔피솔미’를 불러댔다. 선생님의 지휘봉은 회초리로 돌변하곤 했다.

유식해지려고 하는 공부를 무식하게 하던 시절이었다. 당시 중3 교실의 점심시간은 15분. 후배들이 운동장에서 공 차고 노는 소리와 지직거리는 교실 스피커에서 나오는 방송수업 강의가 뒤섞여 들리던 장면이 떠오른다. 이런 풍경을 만들어낸 ‘입시체제’가 특정 지역이나 개인에게만 작동한 것도 아니었다. 까라면 까고, 하라면 하고, 안 되면 되게 하는 그 시대의 ‘미니어처’가 바로 교실이었다. 오죽하면 “내 사전에 불가능은 없다”는 나폴레옹이 백마를 타고 알프스를 넘어가는 그림이 참고서·문제집의 표지를 장식했을까. 참고서 이름은 <완전정복>, 책 이름을 수식하는 부제는 ‘참고서의 왕·문제집의 왕’이었다. 그렇게 시대정신에 딱 들어맞는 이름이 중학생용 참고서에 붙어 있었다.

기업 경영은 더하면 더했을 것 같다. 비 오는 날 폐수를 개천에 흘려 버리는가 하면, 말단 공무원부터 청와대까지 관청에 뒷돈을 대야 했다. 문어발식 확장에 선단식 경영은 큰 회사의 성공 방정식이었다. 환경(E)·사회(S)·지배구조(G)가 경영의 중심에 놓이는 ESG 시대라는 요즘이라면 ‘망하는 지름길’이었을 일들이 횡행했다.

다시 교실 풍경으로 돌아가보면, 이제는 두들겨 패며 달달 외울 것을 강요하던 시절과는 작별을 고한 듯하다. 얼핏 상전벽해 같아 보이지만 학생에게 가해지는 유무형의 압박은 결코 덜하지 않다. 기계적인 암기와 무한반복을 통한 체화가 ‘완전정복’의 예전 방식이었다면, 이제는 시험점수와 교과성적은 기본으로 갖추고 다재다능·팔방미인·전인적 인간에 가까워져야 입시도 성공하는 시대가 됐다.

‘돈 버는 것’이 경영의 최고 가치이던 시대에서, 이제는 지구를 살리고 사회적 책임도 다하고 지속 가능한 민주적 의사결정 구조까지 갖춰야 하는 시대가 됐다. 그렇다고 돈을 못 벌어서도 안 된다. 예전 완전정복 참고서만 놓여 있던 서점 진열대에는 수백 수천종의 참고서가 빼곡하게 차 있다. 노래만 부르면 됐던 계명창보다 몇십배 공을 들여야 하는 악기 연주까지 다 해내야 하는 숙제들이 기업들 앞에 쌓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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