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가까워지고 싶어 그랬더라도

2021.05.26 03:00 입력 2021.05.26 10:12 수정

한때 손윗사람에게 반말을 그렇게 해보고 싶었다. 대학 시절 단과대학 학보사에 ‘노사장’이란 별명의 동기가 있었다. 사장님다운 배포를 지녔다며 우리가 그렇게 불렀던 그 친구는 동아리 내 거의 모든 선배에게 말을 놓았다. “에이 형, 왜 이래” 이렇게 은근하고 자연스럽게. 심지어 여러 학번 위의 첫 편집장 선배한테도 그랬다. 그땐 그게 부러웠다. 짧아진 말끝만큼 상대와의 거리가 좁혀진 것으로 보여서. 나 역시 후배가 스리슬쩍 반말을 할 때면 발끈하는 척하였지만 내심 그만큼 내가 상대에게 편한 존재가 되었구나 싶어 기분 좋았으니 말이다.

이소영 제주대 사회교육과 교수

이소영 제주대 사회교육과 교수

그러던 어느 날 용기를 내었다. 편집회의 뒤풀이에서 앞에 놓인 소주잔을 ‘원샷’한 다음, 옆자리 선배에게 잔을 내밀며 “나도 한잔 줘” 했던 거다. 일순간 떠들썩하던 테이블이 고요해졌다. 보통 그럴 때면 선배들이 “어, 이 녀석 봐라” “이거 안 되겠네” 식으로 장난스레 면박 주며 웃고 떠드는 분위기로 흘러가곤 했는데, 토끼 머리핀을 꽂고 다니던 조그맣고 조용한 후배에게 그들은 ‘이 녀석 이거’ 같은 말을 차마 할 수 없었던 모양이다. 더욱이 그날 내가 말 놓았던 선배는 평소 장난을 모르던 진지한 사람이었고, 편집회의 몇 시간 전 미리 “이번 달 알바비를 아직 못 받아서 오늘은 간식을 조금밖에 못 사갈 것 같아”라고 후배들에게 문자를 보내던 세심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취중에도 실수했음을 직감했다. 몹시 미안했지만 이제 와 장난친 거였다 말하면 더 불편해질 듯했다. 침묵 중에 뒤늦게 주위에서 “소영이가 오늘 좀 많이 마셨구나, 허허” 했고, 한 명이 숙취해소 음료를 사와서 내밀었다.

대학원 다닐 무렵엔 또 다른 게 부러웠다. 각별한 친구끼리 서로를 정답게 ‘갈구는’ 것. “그 옷 참 어울리네” “칭찬해줘서 고마워” 식의 바르고 고운 대화만 이어가는 대신 “어디서 그런 누더기를 샀니?” “네 옷보단 낫거든?” 식으로 짓궂은 말도 주고받는 것 말이다. 막역한 관계에서만 통용될 그런 장난이 부러웠다. 그게 나와 타인의 관계를 한 뼘 가깝게 하리라 생각했다. 그래서 다시 용기를 내봤다. 대학원 동료들이 몇몇 모인 저녁식사 자리에서. 세미나 발표문 준비하느라 남자친구를 몇 주째 못 만났다던 친한 후배에게 “아유, 쌤통이다”라 말했고, 이내 좌중이 조용해졌다. 평소 부러워한 장면들처럼 후배가 내 어깨를 툭 치며 “에이 언니, 뭐예요!” 깔깔 웃는 상황을 예상했으나 그녀는 어깨를 움찔하더니 “언니…” 하고 말을 잇지 못했다. 너무 미안했고, 바로 사과했다. 다음날 점심 먹으며 동기에게 어제 내가 이상해 보였는지 물었더니 이상했단다. 평소의 너답지 않았다고. 더 가까워지고 싶어 그랬던 거라고 시무룩하게 답하자 그가 말했다. “그럼 네가 더 가까워지는 방법은 그게 아닌 거야.”

일일연속극이나 아침드라마를 보면 “너답지 않아”라며 만류하는 말에 “나다운 게 뭔데?”라고 맞받아치는 장면이 클리셰처럼 등장한다. 나다운 게 뭔지는 나도 모르지만 나답지 않은 게 무엇이 되어야 할지는 알 듯하다. 이쪽에선 호의였고, 유사한 상황에서 타인이 행했을 때 호의로 받아들여졌을지라도, 눈앞의 상대에게 불편함이나 당혹감을 주는 말과 행동으로 닿았다면 그 관계에선 나답지 않은 무엇인 거다. 웃음을 유발하려는 의도였든, 격의 없이 다가가고픈 제스처였든 아무리 각별한 사이라도 상대의 마음을 다치게 하는 건 내가 더 가까워지는 방법이 될 수 없다. 예전 그때 “나도 한잔 줘”와 “아유, 쌤통이다”가 그랬듯이. (고백하자면 근래에도 좋아하는 동료가 논쟁 중에 “선생님, 안경 벗고 따라 나오세요”라 했던 일화를 전해 듣고 그 말이 유쾌해서 따라 해보고 싶어졌으나 꾹 참고 있다.)

매 관계 안에서 나만의 친밀함의 온도와 거리를 가늠하며 ‘급발진’하지 않은 채 서서히 나아가려 한다.

추천기사

바로가기 링크 설명

화제의 추천 정보

    오늘의 인기 정보

      추천 이슈

      이 시각 포토 정보

      내 뉴스플리에 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