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짜모 좋노

2021.08.30 03:00 입력 2021.08.30 03:03 수정

마음 졸이던 12호 태풍 ‘오마이스’가 지나가고 ‘가을장마’가 왔다. “하이고, 가을장마가 오면 곡식이 썩는다는데 우짜모 좋노.” 이른 아침부터 마을 아지매(할머니)가 찾아와 걱정을 늘어놓으신다. 대문이 없는 마을이라 언제든지 한 식구처럼 이웃집에 들어갈 수 있다. 열 몇 집밖에 안 되는 작은 산골에 대문을 걸어 잠그고 살면 얼마나 삶이 팍팍하겠는가. 대문이 없어야 지나가는 바람도 마당에 쑥 들어와 편안하게 쉬었다 가지 않겠는가.

서정홍 시인

서정홍 시인

지난해는 두 달 남짓 비가 오는 바람에 참깨 농사가 폭삭 망했다. 그나마 우리 마을에서 참깨 씨앗이라도 건진 장대 아지매가 있어 참 다행이었다. 그 씨앗은 장대 아지매가 시집올 때 물려받은 거라고 한다. 그 씨앗이 없었으면 우리 마을 참깨 농사 대가 끊길 뻔했다. 누가 뭐라 해도 ‘돈벌이 농사’(대농)가 아닌, 여러 가지 작물을 심어 소박하게 살아가는 ‘살림살이 농사’(소농)를 짓는 농부가 있어 올해도 참깨 씨앗을 심을 수 있었다.

올해는 한살림 생활협동조합(생협)에서 생산자들한테 참깨를 심어 달라고 해서 ‘사명감’을 갖고 참깨를 심었다. 샘밭 들머리엔 5월10일에 심고, 살구나무 옆엔 5월20일에 심었다. 왜냐하면 기후변화로 시기를 조금 다르게 심어야 흉년이 들더라도 씨앗이라도 건질 수 있기 때문이다. 하마터면 한 마을에서 수백년 동안 심던 토종씨앗이 사라지고 말 뻔했다.

지난해 생협에서 국산 참깨가 모자라서 참기름을 팔지 못했다고 한다. 아무리 돈이 많으면 무어 하겠는가. 씨앗이 사라지면 먹고살 수 있는 길이 사라지는데 말이다. 지난해 참깨 씨앗을 살린 장대 아지매가 있었기에 우리 마을 사람들은 올해도 참깨를 심을 수 있었다. 지구를 살리는 마지막 희망이 ‘소농’이라는 말이 올해처럼 가슴 깊이 다가온 해는 없다.

산골 마을은 거의 다랑논이고 밭도 비탈진 산밭이라 먹고살려면 서로 도와가며 살아가는 소농일 수밖에 없다. 그런데 먹고사는 일이 만만찮다. 농사는 때를 놓치면 거둘 게 없는데, 날이 갈수록 기후변화가 심해 때를 맞추어 농사짓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8월20일쯤 심어야 하는 김장 무씨를 가을장마가 길어지는 바람에 심지도 못했다. 생협과 재배계약을 맺은 유기농 무가 1500개나 되는데 걱정이다. 이럴 때는 우리 마을 농업 박사님들(아지매들)을 찾아가 묻는다. “아지매는 언제 무씨 심을랍니꺼?” “아무 말도 말고 기다려 보거라이. 비 오는 거 봐 가면서 우리가 심자 하모 심으모 된다. 무씨 심어 놓고 큰 소낙비라도 내리모 무씨 다 떠내려간다 아이가. 때가 되모 알려주꺼마.” 그때를 기다리다 어제 무씨를 겨우 심었다.

오늘은 아내와 김장배추 모종을 심고 있는데 소낙비가 쏟아졌다. “여보, 소낙비 그칠 때까지 기다려볼까요? 아니면 내일 심을까요?” “아니, 내일도 모레도 비소식이 있던데요. 그냥 비 맞고 심읍시다.” “그럽시다. 빨갛게 익은 고추도 따야 하고, 주렁주렁 달린 여주와 가지도 따서 말려야 하고, 대파밭과 당근밭에 김도 매야 하고, 생강밭에 웃거름도 주어야 하고, 마늘밭과 양파밭도 갈아 놓아야 하는데 우짜모 좋노. 며칠 있으모 녹두도 따야 하는데 가을장마는 언제 끝날랑가.” 아내 걱정을 덜어 주려는지 비가 멈추었다. 참 고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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