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정함을 드러내기 위해 필요한 것들

2022.03.17 03:00 입력 2022.03.17 03:04 수정

[하리하라의 사이언스 인사이드] 다정함을 드러내기 위해 필요한 것들

1950년대 초, 구소련의 생물학자 드미트리 벨라예프와 그의 제자 류드밀라 트루트는 일명 ‘여우 가축화 프로젝트’를 시작한다. 식육목 개과에 속하는 여우는 야생성이 강해 인간을 잘 따르지 않는다. 이들을 가축화시키기 위해서는 어떤 조건이 필요할까? 많은 학자들은 가축으로 길들일 수 있는 동물의 조건을 여러 가지 나열했지만, 벨라예프와 트루트가 주목한 조건은 단 한 가지, 인간에 대한 공격성의 정도였다. 야생성이 강한 여우는 기본적으로 인간을 경계하지만, 개개의 차이는 있어서 어떤 녀석은 더 공격적으로 굴고 다른 녀석은 상대적으로 적개심을 덜 드러내기도 한다. 벨라예프와 트루트는 여우 집단의 구성원 중에서 공격성이 가장 낮은 10%만 따로 선별한 뒤 교배시켜서 새로운 집단을 만들었다. 여우는 1년에 한 번, 봄철에만 짝짓기를 하고 태어난 이듬해면 번식이 가능하다. 매년 연구진은 집단에서 공격성이 낮은 10%를 선발해 번식시키고 그렇게 태어난 세대 중에서 다시 공격성이 낮은 10%를 골라 번식시키는 일을 반복했다. 그러자 놀라운 변화가 일어났다. 겨우 20세대쯤 지나자 개와 집에서 함께 살 수 있을 만큼 온순하고 친화력 좋은 개체가 태어난 것이다.

다정한 개체들이 더 오래 살아남아

이은희 과학저술가

이은희 과학저술가

연구자들이 선별에 있어 참고한 것은 오직 개체가 보이는 공격성의 강도뿐이었다. 그들의 털빛이나 체구, 골격 따위는 선별대상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우들이 점점 순해짐에 따라 그들의 신체에도 변화가 나타났다. 쭉 뻗은 꼬리는 동그랗게 말렸고, 뾰족했던 주둥이는 점점 짧아지고 이빨은 작아졌으며, 길쭉했던 두개골은 점점 둥그렇게 변했고, 검었던 털빛은 희게 변하거나 얼룩점이 생겨나면서 더 다양한 색으로 분화되었다. 세대가 거듭될수록 여우의 외모는 점점 강아지를 닮아갔다. 변화는 생화학적 수준에서도 일어났다. 온순한 개체들의 혈중 코르티코스테로이드는 점점 감소했으며, 소위 ‘행복호르몬’이라는 별칭을 지닌 세로토닌은 5배 가까이 증가했다. 가장 놀라운 것은 인지기능의 변화였다. 온순한 개체일수록 인지기능이 더 좋았고, 개체들 사이의 협력적 의사소통 수준도 훨씬 더 높았다. 그저 공격성이 낮고 순한 개체만을 거듭 번식시켰을 뿐인데, 놀랍게도 더 다양하고 더 귀여우며 더 행복하고 심지어 더 똑똑한 여우가 태어난 것이다.

과학자들은 공격성이 낮은 개체들의 지능이 더 발달하는 것을 낮아진 공포심에 대한 반대급부로 보았다. 기본적으로 야생의 개체들은 두려움에 민감하게 반응한다. 그들을 둘러싼 세상은 낯설고 위험한 곳이기에, 두려움을 느끼는 것은 생존에 도움이 된다. 하지만 두려움은 상대와의 소통보다는 단절을, 협력보다는 도피를, 공존보다는 각자도생의 길로 이끌기에 고려할 바가 적다. 홀로 사는 삶보다 두루두루 함께 사는 생활이 고려해야 할 것이 더 많음은 당연하다. 두려움이 누그러들면 호기심이 생기고, 상대와 상호관계를 맺기 위해서는 상대를 예민하게 읽어내는 방법이 중요해지고, 이 과정에서 인지적 기능이 향상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 여우들의 이야기가 담긴 <다정한 것이 살아남는다>에서 저자들은 더 영리한 동물을 원한다면 더 양순한 개체들을 번식시킬 것이며, 결국 다정한 개체들이 더 안정적인 집단을 이루어 더 오래 살아남으리라고 주장한다. 이는 인간도 예외는 아니다.

상호협력의 믿음 먼저 심어줘야

다만 여기에는 숨겨진 전제조건이 하나 있다. 공격성이 약하고 순한 개체들이 번성하기 위해서는 그들을 둘러싼 환경이 안정적이고 안온해야 한다는 것이다. 여우는 애초부터 상호협력할 수 있는 능력을 본성적으로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야생이라는 환경에서 양순함은 오히려 생존의 걸림돌이 될 수 있었기에 이는 겉으로 드러나기 어려웠다. 여우의 타고난 친화력이 두드러질 수 있었던 것은 인간이 그들의 생존을 보장하는 울타리가 되어준 이후였다. 서로에 대해 공격의 날을 세우고 분노를 표출하는 방식보다는 다정하게 상대를 살피고 상호협력하는 쪽이 인간 집단 전체의 생존과 번성에는 더욱 유리할 것이라는 사실은 자명하다.

대부분의 사람들 마음속에는 타고난 선한 본성이 한 조각쯤은 남아 있기 마련이다. 이 선한 본성을 겉으로 드러내 서로를 보듬기 위해서는 그런 ‘약한’ 구석을 내비쳐도 조롱이나 혐오의 대상이 되지 않으며 공격이나 위협에서 자유로울 수 있을 거라는 믿음이 먼저 필요하다. 변화를 맞이하고 있는 우리 사회와 정부와 시스템이 이 믿음을 먼저 심어주기를 간절히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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