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이성은 정말로 이성적인가

2022.04.05 03:00 입력 2022.04.05 03:03 수정

이준석 국민의힘 대표가 숫자 하나를 던졌다. 94%. 서울시 내 지하철 역사 중 엘리베이터가 설치되어 ‘1역사 1동선’이 확보된 역사의 비율이다. 이 대표는 이 숫자를 갖고 장애인들의 지하철 이동권 시위에 정당성이 없다고 주장했다. 그러자 그의 지지자를 비롯한 일부 누리꾼들이 일제히 그 숫자를 들고 다니며 장애인들을 비난하기 시작했다. ‘장애인들이 이성이 아니라 감성에 호소하고 있다.’ ‘떼쓰지 말고 통계를 보라.’ ‘시위에 다른 의도가 있는 것 아니냐.’ 그런 말들이 공론장을 채웠다.

강남규 문화사회연구소 연구위원

강남규 문화사회연구소 연구위원

“감정이 아니라 이성으로 얘기해야 한다”고? 이준석의 ‘94%’는 정말로 ‘이성적’인 걸까. 숫자의 뒤편엔 더 많은 숫자들이 숨겨져 있다. 21년이라는 숫자는 어떤가. 2001년 오이도역에서 휠체어 리프트 사고로 장애인 부부가 사망한 뒤로 21년간 장애인들은 이동권을 요구하며 싸워왔다. 어떤 사람들은 “2024년까지 100%”에 의기양양하지만, 장애인들에게는 “23년 만에 100%”인 것이다. 100%? 2002년에는 이명박 당시 서울시장이 2004년까지 100%를 약속했고, 2015년에는 박원순 당시 서울시장이 2022년까지 100%를 약속했다. 약속이 두 번이나 지켜지지 않았다는 사실을 장애인들은 뼛속부터 기억한다.

45%. 2021년 1월 통계에 따르면 서울시 내 지하철 역사 승강기의 45%가 설치 후 15년이 지난 노후설비라고 한다. 고장 가능성이 높다는 뜻이다. 지하철 역사가 아닌 철도역사 통계이긴 하지만, 2016년부터 2020년 8월까지 엘리베이터 고장 건수가 5222건이라는 통계도 있다. 단순 계산으로 하루에 3건 정도다. ‘1역사 1동선’은 그럴듯하게 들리지만, 실상 엘리베이터가 하나뿐인 역사에서 엘리베이터가 고장 나면 장애인들은 그 역사를 이용할 수 없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서울시 내 저상버스 도입률 59.8%(2021년 기준)라든지 휠체어 이용 가능 고속버스가 10대에 불과하다든지 하는 숫자들도 있다. 그나마 서울이니까 이 정도라도 되는 것이다.

일상에서 이 숫자들을 마주치는 장애인들의 감각의 문제를 상상해내야 한다. 2024년 내 100%를 달성하겠다는 원대한 약속을 듣고서도 기어이 시위에 나서는 장애인들의 결의는 저 숫자들이 쌓아온 배신감, 절박함에서 비롯된 것일 수 있다는 사실을 상상하지 못하는 ‘이성’은 정말로 이성적인가. ‘엘리베이터가 고장 났으니 계단이나 에스컬레이터를 이용하라’는 태연한 안내문, 혼잡시간대에 지하철을 타려는 휠체어 이용자에게 쏟아지는 눈총들과 수군거림. 대중교통은 ‘시민의 발’이라는데, 장애인은 언제나 ‘두 번째 시민’으로 밀리는 존재란 걸 경험적으로 알기에 더 책임 있는 권력자의 약속과 실질적인 예산 반영을 요구하는 장애인들의 끈질김을 추론하지 못하는 ‘이성’은 정말로 이성적인가.

이준석과 같은 사람들이 말하는 이성이란 게 대부분 이런 식이다. 그들의 경험 수준에 갇힌 반쪽짜리 이성이다. 이 경계를 넘어서는 데 그들이 반대하고 무시하는 그 ‘감정’이 역할을 한다. 아프다고 말하는 사람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그들의 맥락을 이해하려는 노력은 감정이 움직여야만 가능한 일이다. 감정을 통해 감각을 이해하고, 감각을 이해함으로써 사실관계를 재구성하는 것. 이것이 맥락 없는 숫자에 집착하는 좁은 이성보다 좀 더 이성의 최종적인 정의에 가까울 것이다. 18세기의 이마누엘 칸트는 ‘이성을 사용할 용기’를 말했지만, 21세기의 우리에겐 ‘감정을 직시하는 용기’가 더 필요한 것 같다.

감정 없는 이성에도 쓸모가 아주 없진 않다. 메신저를 공격해 ‘싸움’에서 이기는 데는 어느 정도 유용할지도 모른다. 그런데 장애인 이동권 논의의 목적이 단지 상대방을 이겨먹는 데 있는가. 정치의 목적과 쓸모가 고작 그런 데 있겠는가. 이기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문제를 해결하는 게 언제나 더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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