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픔을 거부하는 권력

2022.11.15 03:00 입력 2022.11.15 03:04 수정

정혜윤 CBS PD가 2015년 11월 오마이뉴스에 기고한 글 한 대목을 잊을 수가 없다. 세월호 유가족과 광주 유가족의 만남을 묘사한 글이었다. 그들은 만나자마자 서로에게 미안해했다. 세월호 참사를 겪기 전까지는 광주에서 자식 잃은 부모 마음을 몰랐다고 세월호 유가족들이 미안해했고, 우리가 안산으로 가야 했는데 광주까지 오게 했다고 광주 유가족들이 미안해했다. 이들의 만남에 동행한 정혜윤 PD는 이렇게 적었다. “놀라운 것은 가장 슬픈 자들이, 가장 고통받는 자들이 오히려 책임을 지려고 한다는 것이다.”

강남규 문화사회연구소 연구위원

강남규 문화사회연구소 연구위원

‘가장 슬픈 자들이 모든 책임을 떠안고 있다.’ 글의 제목이기도 한 이 문장은 참사가 일어난 현장이면 어디서든 재확인된다. 과거사·의문사 피해 유가족들이, 산재 유가족들이, 참사 유가족들이 그렇다. 죽음이 일어난 현장에 같이 있었던 이들도 그렇다. 누군가의 죽음에 자책감과 죄책감을 호소하는 이들은 언제나 가장 슬픈 자들이다. 이 말은 10·29 이태원 참사 현장에서도 다시 한 번 확인되고 있다. 그날 확성기도 없이 상황을 해결하려 뛰어다닌 경찰관은 “소명을 다하지 못해 면목 없고 죄송하다”고 울었다. 그날 비번이라 현장에 출동하지 않았던 소방관은 동료들이 뛰어다닌 영상을 보다가 그날 같이 일하지 못한 것에 죄의식을 느꼈다며 고개를 숙였다. 그날 사람들을 살리려 심폐소생술을 했던 간호사는 “제가 한 심폐소생술이 아프진 않았나요”라면서 미안하다는 말을 추모 현장에 남겼다. 살아남은 생존자는 자신만 살아남아 망자들에게 미안하다고 했다. 이태원역 1번 출구에 붙어 있는 포스트잇들에도 이런 사회를 만들어 미안하다는 말들이 가득하다. 이번에도, 가장 슬픈 자들이 모든 책임을 떠안고 있다.

‘가장 슬픈 자들이 모든 책임을 떠안고 있다.’ 이 말은 ‘가장 큰 책임을 져야 할 자들이 슬퍼하기를 가장 거부한다’라는 말로도 바꿔 쓸 수 있을 것이다. 책임질 이유가 없는 사람들이 끊임없이 자책하는 동안, 가장 큰 책임을 져야 할 이들은 슬퍼하기를 끊임없이 거부한다. 이태원 참사 뒤 한국 사회가 정확하게 그런 모습이다. 참사에 대한 책임감을 가장 크게 가져야 할 이들이 가장 빠르게 책임으로부터 달아나고 있다. 이 지점에서 윤석열 대통령이 며칠 전 수석비서관들과의 간담회에서 했다는 발언은 상당히 투명하다. “막연하게 정부 책임이라고 하는 건 바람직하지 않다.” “(진상규명을 통해) 법적 책임을 명확하게 해야 한다.” ‘국가의 무한책임’을 운운하면서도 함께 새어 나오는 이런 종류의 말들은 대통령을 비롯한 권력자들이 무엇을 두려워하는지, 또 무엇에 무관심한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참사에 대한 책임을 ‘막연한 책임’과 ‘법적 책임’으로 나누고, 이 중 ‘막연한 책임’은 거부하면서 법적 책임만을 다루겠다는 게 윤석열 대통령의 입장이다. 윤석열 대통령이 받아들이길 거부한 ‘막연한 책임’이라는 막연한 말을 정확하게 번역하면 경찰관과 소방관, 간호사와 생존자들, 그리고 유족들이 온몸으로 떠안고 있는, 바로 그런 종류의 책임일 것이다. 저 막대한 권력과 의무를 가진 대통령이 이런 책임에는 관심을 두지 않으면서 오직 권력의 몰락으로 이어질 수 있는 법적 책임만을 두려워하고 있다는 사실 앞에 무슨 말을 어떻게 정제해야 할지 솔직히 잘 판단이 안 된다.

가장 큰 책임을 져야 할 자들은 슬퍼하기를 가장 거부한다. 윤석열 대통령과 집권여당은 지금 시민들이 정부의 법적 책임을 따져 묻고 있는 것이라고 오해하는 것 같다. 하지만 다수 시민들이 분노하며 묻고 있는 것은 ‘너희는 이 참사 앞에 슬퍼하고 있는가’라는, ‘막연한 책임’에 관한 질문이다. 권력 쥔 자들로서, 동료 시민으로서, 그리고 인간으로서 이 수많은 생명을 지켜내지 못한 것에 진정으로 슬퍼하며 자책하고 있는가. 그렇지 않다면, 당신들은 뭘 하자고 그 자리를 지키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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