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포 해경부두에서 3015경비함정으로 83㎞를 15노트 속도로 3시간 달려 도착한 곳에 노란색 부표가 파도에 흔들리고 있었다. 그 외에는 짙푸른 바닷물 위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왼편으로 동거차도와 서거차도가 보이고, 오른편으로는 병풍도가 보이는 맹골수도의 한가운데 세월호 침몰현장이다.

박래군 인권재단 사람 이사, 4·16재단 상임이사

박래군 인권재단 사람 이사, 4·16재단 상임이사

안산에서 새벽 2시에 버스 두 대에 싣고 달려온 뒤였다. 목포 시내에는 가로수마다 노란 수건이 매달렸고, 세월호참사를 기억하자는 현수막들이 바람에 긴장해서인지 팽팽했다. 날은 화창했고, 곳곳에서 벚꽃이며 봄꽃들이 다투어 피어나는 아침이었다. 매년 침몰현장을 찾아가지만, 이번처럼 날이 좋았던 적은 없었다. 기억은 가물가물하지만, 어떤 해에는 비가 내리는 해역에서 비옷을 입고 선상추모식을 하는 때도 있었다.

현장에 도착한 함정 위에서 짧은 추도식을 가졌다. 딸이 배 속에서 죽어갈 때 아무것도 못한 아빠와 아버지가 돌아가실 때 아무것도 못했다는 아들이 추모사를 했다. 그리고 다시 다짐을 한다. 반드시 진실을 밝히겠다는 다짐에 호응을 하듯 뚜우-뚜, 길게 뱃고동이 울린다. 국화꽃을 든 유가족들과 동승한 승객들이 노란 부표가 흔들리는 바다를 향해 섰다. 한동안 바라만 보다가 바닷물 위로 국화꽃을 던진다. 그러고도 한참을 그 자리에 서 있다. 한 엄마는 바닥에 주저앉고 만다. 그가 주저앉은 사이로 노란색 부표가 흔들린다. 그 부표는 네 모서리마다 쓰인 “세월”이라는 글씨도 흔들린다. 울음조차 나오지 못하고, 마음은 말로 표현되어 나오지 못하니 주저앉을밖에.

8년 지나도 그날의 진상규명 요원

국화꽃이 곧 바닷물에 잠겨 들어갈 것 같으면서 물 위에 떠 있다. 그 꽃이 마치 그날 바다의 상황을 말해주는 것만 같다.

세월호 밖으로 나온 사람들은 바닷물 위에 떠 있었고, 그런 그들은 구조를 받았다. 하지만 배 안에서는 계속 “가만히 있으라”는 방송이 나왔고, 사람들은 곧 해경이 올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무서워도 참고 기다렸다. 그리고 전화는 안 되었으므로 가족들에게 문자를 날렸다. “해경이 구하러 온대”하던 문자는 “엄마 사랑해”로 바뀌고 더는 문자도 오지 않았다. 그 물속에서 사투를 벌이던 승객들, 그들의 마지막을 그곳에 서면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그날 인천에서 제주도로 가는 세월호에는 승객 476명이 탑승하고 있었다. 그들 중 304명이 배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죽었다. 사망률 63%다. 세월호가 기울어갈 때 옆으로 지나가던 둘라에이스호는 사람들이 구명조끼를 입고 바다로 뛰어내리기만 하라고 요청했다. 자신들의 배에는 바다에 빠진 이들을 모두 승선시킬 수 있었다. 그런데도 많은 사람들이 배를 빠져 나오지 못했다. 다만 이준석 선장을 비롯한 18명의 선원들은 123정을 타고 탈출했다. 15명의 선원들은 버려졌다. 그중 제주도로 수학여행 가던 단원고등학교 2학년 학생들은 325명이 타고 있었다. 그들 중 250명이 죽었고, 75명만 살아남았다. 사망률은 76%였다. 일반인 승객 104명 중 사망자는 28명이었고, 생존자는 76명으로, 사망률은 28%였다. 학생들 사망률이 일반인 승객보다 3배나 높았다.

동행했던 4·16재단의 대학생기자단 정 아무개 학생이 왼쪽으로 가서 털썩 주저앉고는 안경을 벗고 엉엉 운다. “이렇게 가까운 줄 몰랐어요. 어떻게 이럴 수 있어요.” 그의 어깨를 두드려주면서 “언론으로 보는 거완 다르지. 와서 보면”이라고 말했다. 가족들이 동거차도 산 위에 감시초소를 세워놓고 내려다볼 때도 그랬다. 이렇게 가까운데, 구명조끼를 입은 승객들이 배에서 탈출만 했다면 헤엄쳐서라도 섬에 닿을 수 있을 것만 같은 가까운 거리에서 참사가 일어났다.

새 정부 어떤 노력을 할 것인가 의문

왜 구하지 않았는지, 배는 왜 침몰했는지를 알자고 했지만 지금껏 속 시원한 답을 얻지 못한 채 8년이 지났다. 세월호참사 진상규명을 위해 설치된 사회적참사특별조사위원회가 오는 6월10일 활동을 종료하는 것을 끝으로 공식적인 조사활동은 종료된다. 새 정부는 진상규명을 위한 어떤 노력을 할까? 정치 상황은 더욱 불안하기만 하다.

2년이 지나면 10주기다. 그때에는 세월호 침몰의 진실을 알 수 있을까? 목포신항에 가서 붉은 녹이 훨씬 더 많이 덮인 세월호를 둘러보고 안산으로 돌아오는 길에도 맹골수도 침몰현장의 흔들리던 노란색 부표가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았다.

추천기사

바로가기 링크 설명

화제의 추천 정보

    오늘의 인기 정보

      추천 이슈

      이 시각 포토 정보

      내 뉴스플리에 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