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크라이나 전쟁과 ‘그레이트 디커플링’

2022.05.09 03:00 입력 2022.05.09 03:04 수정

러시아의 침공으로 시작된 우크라이나 전쟁이 석 달째 계속되고 있다. 마리우폴의 극장에 포탄이 떨어져 한꺼번에 수백명이 숨지는 등 민간인 희생자만 수천명이다. 러시아군이 점령했다가 철수하는 지역마다 제노사이드(집단학살)의 흔적이 발견된다.

박영환 국제부장

박영환 국제부장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2차 세계대전 전승일인 9일 향후 계획을 밝힐 예정이다. 전면전 선포 대 전쟁중단 선언이란 상반된 관측이 나온다. 어느 쪽이든 그의 정의롭지 못한 전쟁은 이미 실패했다. 우크라이나 수도를 점령하고 정권을 바꿔 친러시아 위성국가를 세우려던 초기 목표는 물 건너갔고, 동부 돈바스 지역을 점령해 우크라이나를 동서로 분단시키는 것도 현재로선 쉽지 않다. 전쟁의 명분이었던 돈바스 지역 내 친러 공화국 두 곳의 분리독립이란 최소한의 목표를 이룬다 해도 그것을 위해 이런 엄청난 희생을 치렀느냐는 비난을 피하기 어렵다.

러시아의 전쟁 승패가 세계 정치·경제의 판도를 바꾸지는 않을 것이다. 러시아가 세계 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2~3%에 불과하다. 현재의 러시아는 옛 소련 같은 초강대국도 아니다. 우크라이나의 저항에 막혀 쩔쩔매는 러시아군의 모습을 보면 옛 소련 제국을 부활시키겠다는 늙은 독재자의 야망은 비이성적 망상에 불과함을 쉽게 알 수 있다. 푸틴은 서방의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 확장 저지를 명분으로 우크라이나를 침공했지만 오히려 핀란드와 스웨덴 등의 나토 가입 추진을 정당화하는 역효과를 낳았다.

푸틴의 야망보다 이번 전쟁에서 더 주목해야 할 지점은 디커플링(탈동조화)의 심화다. 디커플링이란 단어를 우크라이나 전쟁이 처음 불러낸 것은 아니다. 파이낸셜타임스는 이미 2019년 올해의 단어로 디커플링을 선정한 바 있다. 미국과 중국의 패권경쟁과 코로나19 팬데믹으로 인해 상호의존이 줄어들고 세계화가 후퇴하는 현상을 설명하기 위한 단어였다. 이런 상황에서 시작된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은 중국·러시아 중심 권위주의 블록과 미국·유럽 중심 민주주의 블록 간의 디커플링에 한층 속도를 붙였다. 세계화 종말론, 신냉전론이 제기되는 배경이다.

과거 서구는 세계화와 상호의존이 심화되면 자유주의 질서가 확대되고 중국 같은 권위주의 국가도 변화시킬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세계화의 진전에도 권위주의 국가는 줄어들지 않았다. 오히려 중국은 세계화에 무임승차해 글로벌 ‘넘버투’로 성장했고 미국의 패권에 맞서기 시작했다. 이에 미국은 중국과의 경제적 결속을 끊고 대중국 의존을 줄이는 정책을 본격화했다. ‘미국 우선주의’를 내건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중국 수입품에 폭탄관세를 부과하고, 중국 기술기업을 제재했다. 미국은 나아가 민주주의를 공유하는 국가들만의 독자적인 경제·기술 생태계 구축에 본격 나섰다. 중국도 일대일로 등을 통해 중화질서 확장에 속도를 내고 있다. 이 와중에 코로나19 팬데믹은 미·중의 독자적인 공급망 구축 의지를 강화했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세계는 더욱 선명하게 두 진영으로 분리되고 있다. 미국과 유럽연합(EU)은 러시아 은행들을 국제 결제망에서 퇴출시켰고, 러시아에 대한 에너지 의존에서 벗어나겠다고 선언했다. 러시아는 에너지 수출을 중단할 수 있다며 자원 무기화로 맞대응하고 있다. 상호의존은 이제 주권과 안보에 위협이 되고 있는 상황이다. 정치적 분열과 대립은 경제적 단절을 심화시키고 있다. 전쟁 발발 이후 450개 이상의 글로벌 기업들이 러시아에서 철수하거나 사업을 축소했다. 미국의 패권에 도전하는 중·러 중심 블록화도 선명해졌다. 중국은 서방의 러시아 제재에 반대하며 국제무대에서 중·러 협력을 한층 강화했다. 인도, 브라질, 사우디아라비아, 남아프리카공화국 등도 제재에 불참하며 미국의 리더십에 반기를 들었다. 미·중 패권경쟁 속 코로나19 팬데믹에 이은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거대한 결별, ‘그레이트 디커플링’은 점점 현실이 되고 있다.

디커플링의 심화는 한국에 기회보다는 위기로 다가온다. 미·중 디커플링이 심화될수록 그 어느 나라보다 자율적 대외정책의 공간이 좁아지고 선택의 압력에 시달려야 하는 나라가 한국이다. 곧 출범할 윤석열 정부가 미국과의 군사·경제·기술 동맹을 강화하면서 동시에 중국이란 최대 시장을 유지하고, 북핵 문제 해결을 위한 중국의 협력까지 이끌어내기는 더욱 어려워질 것이다. 디커플링이 부과하는 선택의 딜레마를 극복할 현명한 대외정책이 어느 때보다 중요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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