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큐 왕자 살해설의 전모와 후폭풍

17세기 이후 아시아에서는 조선인들이 제주도에 표류했던 류큐(지금의 오키나와)의 왕자를 살해했다는 소문이 돌았다. 이 이야기의 전모는 이중환의 <택리지>(1751)에 나온다. 인조대에 일본이 류큐를 공격해서 그 왕을 잡아가자, 류큐의 세자는 물만 넣으면 술로 변하는 돌인 주천석과 모든 것을 덮을 수 있는 거미줄로 짠 만산장으로 아버지를 구하고자 한다. 그런데 풍랑을 만나 제주도에 표착하게 되었는데, 제주 목사가 이 보물들이 탐이 나 몰수하고 세자를 죽이고 그가 왜구였다고 꾸며 무고했다.

소진형 서울대 인문학연구원 선임연구원

소진형 서울대 인문학연구원 선임연구원

류큐 왕자 살해설이라고 불리는 이 이야기는 조선에 광범위하게 퍼져 있었다. 이중환만이 아니라 박지원도 이에 대해 언급하고 있으며, 1930년대에도 동일한 이야기가 채록된 바 있다. 그런데 이중환의 이야기를 살펴보면 이상한 곳이 많다. 일단 제주 목사가 뺏었다는 보물의 출처를 알 수 없다. 또, 왕자가 실존인물인지도 확인되지 않는데, 일본의 류큐 공격 때 잡혀간 쇼네이왕(尙寧王)의 자식에 대한 정보를 찾기 어렵기 때문이다. 이중환이 언급한 사건의 시기도 틀린다. 제주 목사가 표류한 배를 왜구라고 무고한 사건은 분명히 있었지만, 인조가 아닌 광해군대에 발생했다.

1611년 제주 목사 이기빈은 광해군에게 왜구를 잡았다는 장계를 올리고 이에 대해 포상을 받았다. 그런데 그 이후 사건은 거짓이며 이기빈이 욕심 때문에 중국의 남경 사람들과 베트남의 상인들을 왜구라고 몰았다는 비판이 지속되었다. 조사 결과 이기빈과 그 일당이 습격한 외국배는 왜구의 배가 아닌 상선으로, 중국인, 일본인, 류큐인이 타고 있었으며 엄청난 양의 재화를 싣고 있었다고 한다.

제주 목사와 그 일당이 외국배를 습격해서 재화를 탈취한 사건은 갑자기 인조대에 류큐 왕자 살해설로 변모한다. 인조대에 작성된 이기빈의 졸기에는 그가 류큐 왕자 등을 모두 죽이고 재화를 빼앗아 사람들이 애처롭게 여겼다는 이야기가 부기되어 있다. 18, 19세기 표류기나 연행기를 보면 조선뿐 아니라 다른 국가들에도 왕자 살해설이 여전히 유통되고 있음이 확인된다.

특히 류큐에 표착하게 된 제주도인들은 자신의 출신지를 들킬까 두려워 제주도인임을 증명하는 것들을 바다에 버리고 다른 지역에서 왔다고 거짓말을 했다. 베트남에서는 조선인이 베트남 왕자를 죽였다는 소문이 돌았다. 베트남에 표류한 조선인들, 특히 제주도인들은 자신들이 저지르지도 않은 일에 대해 비난과 위협을 받았다.

정동유라는 조선 후기 지식인은 조선인들은 정말로 류큐 왕자를 죽였을까라는 의문을 가지고 표류했던 제주도인들을 찾아다닌다. 그는 이때 류큐 왕자 살해설이 퍼져나가다가 베트남 왕자 살해설과 같은 다른 버전으로 변형되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정동유는 북경에서 류큐 사신들을 만난 연행사들에게 그들의 조선 인식을 묻는다. 류큐인들은 조선인들에 대해 원수처럼 생각하지 않는다는 얘기를 듣고 난 뒤 정동유는 그의 책 <주영편>에서 류큐 왕자 살해설이 지나치게 과장된 것이라고 결론짓는다.

류큐 왕자 살해설은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단언할 수는 없지만, 일본의 류큐 국왕 구류 및 그로 인한 조선과 류큐의 외교 단절, 인조반정 이후 광해군의 정치에 대한 부정적 인식, 표류한 배에 대한 소문이 얽혀서 만들어지고 그럴듯한 정황들이 더해졌을 것이라는 추측을 해볼 수 있다. 이러한 소문은 가짜 증거와 결합해 사실로 받아들여지기 쉽다. 후대의 기록자들은 이 사건에 극적인 효과를 더하기 위해 류큐 왕자의 시를 덧붙이기도 하고 조선인에 대한 류큐인들의 관대함을 강조하는 일화를 남기기도 한다. 이렇게 “만들어진 사실”들이 반복되고 부풀려짐에 따라 오랜 기간 동안 조선인들은 류큐에 대해, 류큐인들의 조선인에 대한 감정에 대해, 그리고 무엇보다 조선인 자신들에 대해 왜곡된 상을 갖게 된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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