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는 비가 내렸다. 바짝 마른 대지를 적시는 비를 맞으며 마석 모란공원에 갔다. 현충일인 6월6일은 내 동생의 기일이기도 하다. 벌써 34년 전 동생은 유서 써놓고 몸에 불을 지르고 먼저 저세상으로 갔다.

박래군 인권재단 사람 이사, 4·16재단 상임이사

박래군 인권재단 사람 이사, 4·16재단 상임이사

1988년 6월은 뜨거웠다. 지열이 훅훅 달아올랐고, 대학생들은 88 올림픽을 앞두고 남북 공동 올림픽을 개최하자고 판문점으로 달려가다가 연행되던 때였다. 민주화 시대가 열리던 초입, 그해 정치는 여소야대 국면이었다. 직선제로 광주학살의 원흉 노태우가 대통령의 권좌에 앉아 있었고, 그해 8월 총선에서는 여소야대 국면이 열렸다. 1980년 광주학살에 대한 책임을 물어야 하는데 정치권에서는 정치적 타협으로 문제를 해결하려는 듯했다. ‘민중의 심판으로 학살의 원흉을 처단해야 한다’는 동생의 생각과는 다른 방향으로 진행되는 것 같았다. 그런 상황을 숭실대 인문대 학생회장을 맡고 있던 동생 박래전은 절박한 심정으로 고민했다. 그는 결단을 하고, 생일날 몇 통의 유서를 썼고, 생일 이틀 뒤에 학생회관에 올라가 “광주는 살아 있다” “청년학도여 역사가 부른다. 군사파쇼 타도하자!”고 외치며 몸에 불을 붙였다.

그는 청년학도에게 남긴 유서에서 “오늘 우리는 비겁과 안일과 무감각의 늪에 빠져 있다. 탐욕과 이기주의에 눈이 어두워져 있다”고 질타했다. 노동현장, 탄광, 농촌현장에서 민중이 죽어가고 있고, 앞서간 열사들이 “온몸에 불을 붙였을 때도 희희낙락하며 눈앞의 쾌락을 추구하기에 여념이 없었다”고 분노했다.

민주화세대, 존재도 생활도 변했다

그때 “탐욕과 이기주의에 눈이 어두워져 있던” 세대가 지금은 50대가 되었다. 그 50대는 민주화세대이다. 그들은 청년 시절 전경 앞에서 열심히 화염병을 던지고 쇠파이프를 휘두르며 열심히 싸웠고, 그러다가 제적도 되고, 강제징집도 되고, 수배도 되고, 감옥에도 가던 시대를 살았다. 행동으로 함께 못해도 그런 운동권의 헌신을 많은 시민들이 지지하고 응원했다. 그런 투쟁의 결과로 6월항쟁을 불렀고, 민주화의 시대를 열어젖힐 수 있었다.

그런데 그런 다음에 사회주의권이 급격히 붕괴하자 대부분 운동을 떠났다. 세상은 민주화가 되었고, 민주화에 바친 열정으로 그들은 새로운 시대를 살아갔다. 그 시대의 청년들은 학생운동으로 희생했음에도 직장을 얻어서 자식들도 경쟁적으로 성공시켰고, 사업체도 만들었고, 정치적 지위도 높아졌다. 그들의 정신에는 아직 1980년대의 민주화운동 시대의 열정이 배어 있었지만, 그들의 생활은 변했고, 존재가 변했다.

가난했지만 순수했던 그들은 중산층의 삶을 고스란히 받아들였다. 국가와 사회의 모든 영역에서 그때의 청년들은 중심이 되어 있다. 자랑스러운 청년세대를 살았던 그들은 “나 때는 말이야”를 수없이 읊어대는 꼰대가 되어갔다. 세상은 민주화가 되었다고 하지만 불평등의 늪은 더욱 깊어졌고, 차별과 혐오가 거침없이 난무하는 야만의 시대로 급변했다. 목숨을 걸고 쟁취한 민주주의는 사다리를 걷어차인 지금의 젊은 세대들에게 어떤 희망도 주지 못한다.

오스트레일리아 출신의 정치학자 존 킨은 그의 대저서 <민주주의 삶과 죽음>에서 “민주주의는 겸손 위에서 번영한다”고 했다. 겸손하지 못한 권력자를 견제하는 게 민주주의다. 또 “민주주의는 권력의 ‘평등화’를 지향한다. 폭압적인 지배를 불가능하게 만듦으로써, 그리고 통일된 정치체라는 허상을 제거함으로써 민주주의는 승자를 통제하려 한다”고도 했다.

민주주의, 다시 위기의 시대에 있다

우리는 다시 민주주의의 위기를 말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 자유는 증진되었지만, 불평등은 더욱 심화된 시대이기 때문일 것이다. 자본과 소수의 기득권층에 집중된 권력의 평등화가 새로운 민주주의의 가능성을 열 수 있는 것은 아닐까? 탐욕과 이기주의에 어두워져서 기존의 게임 룰이 공정하다고 강변하는 한 권력의 평등화는 이루어질 수 없다. 수많은 청년들이 절망하는 시대, 기후위기가 인간의 멸종까지 불러올 위기의 시대에 민주주의는 어떤 민주주의여야 할까?

나 또한 잘못 살아왔다. 민주주의에도 삶이 있거늘 새로운 민주주의를 고민하고 실천하지 못하고 안일과 무감각의 늪에 빠져 살아왔다. 반성의 마음을 담아서 붉은 장미 한 다발을 동생 무덤 앞에 놓았다. 34년 전 저세상 사람이 된 동생이야 말이 없지만, 내 마음이 이랬다. 그렇게 동생이 잠들어 있는 마석 모란공원에 다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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