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과거

2022.09.05 03:00 입력 2022.09.05 03:01 수정
김정수 시인

[詩想과 세상] 아름다운 과거

짓밟힌 잔디처럼 누워 있던 목소리가 이곳저곳으로 번져가고 있다 말하고 싶지 않으면서도 끝내 털어놓게 되는 이야기들 여름의 잡초처럼 녹색으로 물들던 상처들 점점 번져가다 파도가 된다 덮쳐오는 슬픔과 밀려드는 과거 사이에서 파도는 한 자락씩 푸른 늑대가 되어 밤하늘을 날아다닌다 홀로 서 있던 빨간 등대가 늑대들에게 깜빡깜빡 신호를 보내면 우거진 여름 안에서 구불구불 날아드는 늑대들 숨기면 숨길수록 더 또렷해지는 불안이 보름달처럼 높이 떠오르고 우울이 거대한 혹등고래를 타고 천천히 떠 내려온다 계속해서 덮쳐오는 해일과 파도 속에서 이야기는 뼈만 앙상하게 남았네 숨겨오던 불온한 상처들에 대해서 한 번쯤은 온전히 이해받고 싶었지 잠잠히 듣고 있던 당신의 동공 속에서 슬픔이 망각의 비로 흘러내린다 잔디와 파도와 늑대가 혹등고래를 타고 천천히 떠 내려간다

박세랑(1990~)

아무에게도 말할 수 없는 비밀을 간직한 채 살아간다는 건 힘든 일이다. 마음 깊은 곳에 꾹꾹 눌러 온 상처는 끝내 몸과 마음을 잠식한다. 벼랑 끝까지 몰린 후에야 어렵게 털어놓지만, 이내 후회가 밀려온다. 불안한 예감은 늘 적중한다. 어설프게 털어놓은 과거는 “점점 번져” 걷잡을 수는 없는 상황이 된다. 과거를 아름답지 않게 하는 건 사람이다. 수면 위로 올라온 상처는 쉽게 덮을 수 없다. 입과 입을 통해 왜곡되고 부풀려져 비수처럼 등에 와 박힌다.

“늑대가 되어 밤하늘을 날아다닌다”는 구절은 미로코 마치코의 그림책 제목에서 가져왔다고 한다. 바람이 거세게 부는 것은 늑대가 하늘을 뛰어다니고 있기 때문이라고. 하늘에서 늑대가 설칠수록 상처는 깊어진다. “숨기면 숨길수록 더 또렷해지는 불안”은 밤하늘을 밝히는 보름달처럼 환해 더 부끄럽다. 설상가상으로 서서히 우울이 덮쳐온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잠잠히 내 이야기를 들어줄 당신이 곁에 있기 때문이다. 단 한 명이라도 들어줄 사람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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