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죽 장갑

2022.10.24 03:00 입력 2022.10.24 03:01 수정
김정수 시인

[詩想과 세상] 가죽 장갑

팔 없는 손이 탁자에 놓여 있다.
할 일을 다 잊은 다섯 손가락이 달려 있다.

손에서 갈라져 나온 손가락처럼
뭔가를 쥐려 하고 있다.
뭔가를 달라고 하는 것 같다.

손가락마다 구부리거나 쥐었던 마디가 있다.
습관이 만든 주름이 있다.
주름 사이에서 몰래 자라오다가
지금 막 들킨 것 같은 손금이 있다.
지워진 지문이 기억을 되찾아 재생될 것 같다.
털과 손톱도 가죽 깊이 숨어서
나올 기회를 틈틈이 엿보고 있는지 모른다.

피도 체온도 없이 손이 탁자에 놓여 있다.
빈 가죽 안으로 들어간 어둠이
다섯 손가락으로 갈라지고 또 갈라지고 있다.

김기택(1957~)

시인은 탁자에 놓여 있는 가죽 장갑을 보고 있다. 장갑을 살펴보는 시인의 눈은 집요하다. 탁자와 장갑이 있는 공간이나 풍경에는 관심조차 없다. 감정을 배제한 채 오로지 가죽 장갑에만 집중한다. 세밀하게 사물을 관찰하고, 시화(詩化)하는 시인의 습관이다. 습관은 머리가 아닌 몸의 기억이다. 장갑이 “할 일을 다 잊은 다섯 손가락”을 떠올리듯 가죽도 장갑이 되기 전 자신을 기억한다. 지금은 “피도 체온도 없”지만, 가죽 본연의 모습과 원래의 몸을 재생한다.

장갑은 “뭔가를 쥐”거나 달라는 듯 손바닥을 위로 향하고 있다. 시인은 “구부리거나 쥐었던 마디”에서 주름을, “주름 사이에서 몰래” 자란 손금을 떠올린다. 손금과 지문은 장갑을 낀 사람의 생애이면서 몸에서 분리되기 전 가죽의 이력이다. 낡은 가죽만큼 한 사람의 인생도 저물어가고 있다. 재생은 지난 시절의 추억과 환생을 동시에 상징한다. 생명이 다하고도 가죽으로 남아 희생했으니, 인간으로 환생해도 부족함이 없으리라. 어둠이 지나면 빛이 찾아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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