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초언니’에게 한발 가까이

[이희경의 한뼘 양생] ‘영초언니’에게 한발 가까이

지난 주말 요양원에 있는 선배를 보러 갔다. 지난해 말 첫 방문 이후 3개월 만이다. 눈이 보이지 않는 선배 옆으로 바짝 다가가 인사를 건넸다. “언니~” “언니~” “나, ○○야” “나, ○○야” “○○이 왔어요” “○○이 왔어요” 반향어를 사용하는 것은 지난번과 마찬가지였다.

이희경 인문학공동체 문탁네트워크 대표

이희경 인문학공동체 문탁네트워크 대표

한때 운동권의 대모라고 불렸던 선배가 아들을 데리고 캐나다로 이민을 떠난 것은 20여년 전이다. 그리고 몇 년 되지 않아 교통사고를 당해 불운하게도 뇌를 크게 다쳤고, 운동기능뿐 아니라 시력, 언어능력, 기억력을 완전히 상실했다. 사람들은 그녀가 “바보가 되었다”라고 했다. 난폭한 행동을 일삼는다고도 했다. 다행히 몇 차례의 큰 수술을 통해 의식이 좀 돌아왔는데 그 이후엔 그녀가 종일 먹을 것만 찾는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이후 나는 한국으로 돌아온 선배와 가끔 전화 통화를 했다. 그녀의 기억은 과거 어느 시점에 고정되어 있었고 대화는 세 문장 이상을 이어가지 못했다. 하지만 온종일 라디오 음악방송을 듣고 있다는 선배의 목소리는 늘 밝았다. 명민했지만 예민하고, 다정하기보다는 시니컬했던 그녀였는데, 기억이 사라진 이후 명랑해졌다는 게 아이러니하게 느껴졌다. 그러나 만나러 가는 것은 차일피일 미뤄지고 있었다. 그러다 다시 뇌 발작이 왔고, 완전히 식물인간이 되었다는 이야기를 듣게 된 것이다. 아, 죽기 전에 얼굴 한번 봐야겠구나.

이동형 침대에 누워 있는 선배는 콧줄을 끼고 있었고, 팔과 다리는 굽어 있었으며, 주먹을 꽉 쥔 채였다. 무슨 말을 해도 그것을 반사적으로 따라하는 반향어만 내뱉었다. 눈물이 핑 돌았다. 무엇보다 어떻게 소통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나는 거의 아무 말 대잔치를 벌였다. 그런데 어느 순간 반향어 사이로 짧은 응답이 돌아왔다. “좋아하는 음식이 뭐였지?”라고 묻자 “냉면”이라고 답하는 것 아닌가. 나는 비밀의 문 열쇠를 발견한 느낌이었다. 선배에게도 프루스트의 ‘마들렌’ 같은 게 있을 수 있겠구나. 나는 주의 깊게 선배의 옛 동료, 옛집 등 마음 깊이 저장되어 있을 법한 어떤 순간이나 이미지들을 자극해봤다. 여전히 반향어가 대다수였지만 “기억나” “좋아” “보고 싶어” 같은 응답도 간간이 이루어졌다. 더 놀라운 것은 그 과정에서 요양원 직원이 절대 불가능하다고 사무적으로 말한, 그 꽉 쥔 주먹이 꽃잎 벌어지듯 펴졌다는 사실이다.

올리버 색스는 <아내를 모자로 착각한 남자>에서 이른바 지적장애인이라 불리는 사람들의 임상 사례를 모아놓은 챕터에 ‘단순함의 세계’라는 이름을 붙였다. 우리는 보통 추상적인 개념을 사용하지 못하거나 명제의 방식으로 말하지 못하면 인간 이하라고 생각하거나, 죽은 것이나 진배없다고 여긴다. 그러나 올리버 색스는 그들을 ‘상상을 뛰어넘는 나라를 여행한 사람들’이라고 말하면서 그 이상한 나라는 생기있고 정감 넘치며 상세하면서도 단순하다고 한다. 그곳에서 이른바 지적장애인들은 천진난만함, 투명함, 완전함, 존엄이라는 마음의 질을 가지고 있다는 말도 덧붙인다. 우에노 지즈코도 존엄사라고 불리는 안락사에 반대한다면서 “ ‘존엄한 생’과 ‘존엄하지 않은 생’의 경계선은 어디일까?”라는 질문을 한다. 살아 있을 가치가 있는 삶과 그렇지 않은 삶의 구분은 결국 우생학의 패러다임이다.

그녀는 식물인간으로 덜 실존하는 것이 아니라 단순함의 세계에서 온전히 실존하고 있다. 문제는 그러한 실존을 존엄하게 대하는 환경과 관계가 존재하느냐 여부이다. 그녀를 사랑했던 어머니는 지난해에 돌아가셨고 보살피던 언니는 풍을 맞았다. 이제 그녀 곁에는 자기 살기도 바쁜 아들 하나가 달랑 남아 있을 뿐이다. 난 직감적으로 이제 내가 그녀에게 더 다가가야 할 시점이라고 느낀다. 선배와 내가 친해진 계기가 한때 이념을 공유했기 때문이었고, 멀어진 이유가 각자 먹고사는 데 바빠서였다면, 이제 우리는 돌봄의 이야기를 다시 써나가는 동료로 새롭게 만나야 하는 게 아닐까? 그녀의 이상한 세상은 아마도 내 세상을 더욱 풍부하게 만들 것이므로.

“다음에 올게” “언제?” “여름에 올게”라고 인사를 하고 나오는데 선배의 얼굴에 주름이 하나도 없다는 것이 새삼 눈에 띄었다. 모든 성인의 공통된 가르침이 지나가버린 과거도, 오지 않은 미래도 집착하지 말고 오로지 현재만 살라는 것인데, 선배가 그렇게 사는 것일까, 그래서 주름이 없나, 라는 생각이 설핏 스치면서 슬며시 웃음이 나왔다. 아! 참, 그녀의 이름은 서명숙 작가의 <영초언니>의 주인공, 천영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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