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심하고 민감하게, 나와 식물 이야기

[이희경의 한뼘 양생] 무심하고 민감하게, 나와 식물 이야기

입춘이 지나자 군자란 꽃대가 올라오기 시작했다. 봄이구나. 마음이 분주해졌다. 베란다에 설치해놓았던 비닐하우스를 해체하고 겨우내 그 속에서 최소한의 물로 옹색하게 버틴 화초들의 상태를 살폈다. 마른 잎들은 털어내고 화분의 흙들을 보충하고 알비료도 조금씩 올려주고 오래간만에 커다란 물뿌리개로 화초들을 샤워시켜 묵은 먼지를 털어냈다. 다음엔 한쪽으로 밀쳐놓았던 높고 낮은 화초 받침대를 늘어놓고 실내에서 월동했던 스노 사파이어와 율마까지 데려다 모든 화초가 골고루 햇볕을 받을 수 있게끔 자리를 잡아줬다.

이희경 인문학공동체 문탁네트워크 대표

이희경 인문학공동체 문탁네트워크 대표

이렇게 쓰니, 내가 마치 원예의 달인, 그린핑거스 같지만 사실 난 초등학교 입학 전까지 봉숭아와 채송화도 직관한 적이 없는, 좀 더 나이를 먹어서도 익지 않은 방울토마토와 포도송이를 구별하지 못했던 전형적인 아스팔트 키드 출신의 식물맹이다. 게다가 뭘 만들거나 키우는 데 젬병인 똥손이다. 그런데 몇년 전 어머니의 긴 간병생활에 몸과 마음이 너덜너덜해졌을 때 나는 숨구멍이라도 내는 심정으로 어느 날 갑자기 창고처럼 쓰던 작은 베란다를 치워 정원을 만들었다.

가까운 곳에 큰 농원이 있다는 것은 초보 식물러에게 큰 행운이었다. 난 풀 방구리에 쥐 드나들 듯 그곳을 드나들면서 작은 포트에 담긴 가격이 저렴한 화초들을 사기 시작했다. 흔하디흔한 제라늄, 철쭉, 메리골드 같은 것들이었다. 하지만 야생초들이 그러하듯 그 별것 아닌 것들도 십수 개 모아놓으니 색깔과 향기가 꽤 그럴듯해 영화 <마담 프루스트의 비밀정원> 부럽지 않았다. 매일 아침 베란다에 나가 창문을 열고 화초의 상태를 살피고 물을 주는 그 단순한 노동도 안식이 되었다. 그러다가 “와, 싹 난다” 혹은 “오매, 꽃봉오리 맺혔네”라는 그 짧은 감탄의 순간들이 쌓이면서 식물에서 받는 위로도 점점 커졌다. 식물은 나의 반려였다.

내가 문제를 느끼기 시작한 것은 화초들이 죽어서가 아니라 오히려 죽지 않고 해를 넘겨 살아남기 시작하면서부터였다. 사 올 때는 곧은 가지에 흐드러지게 피어 있던 수국은 해를 넘긴 다음해엔 예전의 수국처럼 크지 않았다. 줄기는 삐뚤빼뚤했고 무성해진 잎을 중간중간 따주었는데도 새로 올린 꽃은 색도 크기도 초라했다. 수선화와 프리지어의 알뿌리를 잘 갈무리해 심어놓았지만, 이듬해 다시 자라기 시작한 애들은 개화기를 넘겨서도 꽃을 피우지 못하고 파처럼 키만 크고 있었다. 내 정원은 더 이상 수려하지 않았고, 아무렇게나 자라나는 혹은 점점 못생겨가는 식물들만 늘어나고 있었다.

“개에 홀딱 빠진 과학자 겸 페미니스트” 도나 해러웨이는 반려견 카엔과 살았던 경험을 녹여 <반려종 선언>을 썼다. 그녀는 반려종은 홀로 되는 것이 아니고 적어도 두 개의 종이 공구성적 관계를 맺어야 가능하다면서 자신은 ‘어질리티’라는 개와 인간의 협동 스포츠를 통해 서로를 끊임없이 훈련시키면서 반려종이 되어갔다고 한다. 어쩌다 식물러가 된 나도 반려종이 될 수 있을까? 포유동물처럼 표정이 있는 것도 아니고 스스로 움직이지도 않는 식물과도 ‘어질리티’가 가능한 것일까?

나는 열심히 가지치기, 비료 주기, 물 주기, 분갈이 등 할 수 있는 일을 다했다. 그런데 햇볕과 바람이 부족한 것은 장소가 갖는 구조적인 문제였고 내가 최선을 다해 식물의 생장에 개입한다고 하더라도 멋진 수형, 풍성한 잎과 꽃이라는 결과가 나오진 않았다. 하지만 그 이야기는 어쩌다 0.8평 내 베란다 정원으로 오게 된 식물들이 완전한 자연도 아니고 인공도 아닌 그곳에서 나의 노력과 무관하게 어떤 식으로든 살기 위해 분투하고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

난 요즘 내 정원이 더 이상 “보기에 아름답기”를 원하지 않게 되었다. 식물들이 나의 시각적 대상이기를 멈추면 나의 책이나 노트북, 손때 묻은 작은 지갑처럼 나와 함께 살면서 세상을 구성하는 수많은 것 중의 하나가 된다. 그러나 이 ‘소중한 타자’들은 세심하고 정성스럽게 돌봐야 하지만 동시에 소유할 수도 통제할 수도 없는 존재들이다. 나는 내 정원에서 이상하게 자라고 있는 수국, 긴기아난, 철쭉들을 바라본다. 이 소중한 식물 타자들에게 좀 더 민감해지고 헌신적인 존재가 되려고 노력한다. 내가 좀 더 가드닝에 솜씨가 있었으면 좋겠다는 바람도 있다. 그러나 동시에 내가 어떻게 하든 그들도 이 공간에서 자신의 방식으로 살고 죽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무심하고 민감하게, 내 식물들과 오래 함께 살아갔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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