택시운전사 방영환에게 견딜 수 없었던 것은 택시업계의 고질적인 장시간 노동과 저임금보다 사장의 모욕과 무시였다. 21개의 택시회사를 소유한 사업주가 제공한 불결하고 열악한 작업환경은 무시의 물질적 표현이었다.

방영환은 2019년 노동조합을 만들었다. 조합원 2명으로 시작해 7명이 되자 사측의 무시는 괴롭힘으로 변했다. 승객이 구토한 차량을 세차도 하지 않은 채 배차했고, 한여름에 에어컨이 고장난 차량을 내주기도 했다. 사측은 방영환을 괴롭히고 탄압하다 해고했다.

방영환은 홀로 싸웠다. 회사 앞에서 1인 시위를 하며, 1·2심을 거쳐 대법원 해고무효 선고까지 3년의 질긴 싸움 끝에 결국 복직이 되었다. 2022년 당시 방영환의 싸움이 짤막하게 기사화되었다. “나는 이기고 돌아온 택시운전사” 기사 제목이 이제야 눈에 밟힌다.

다시 돌아온 택시노동자 방영환을 사측은 더 잔혹하게 괴롭혔다. 사측은 계약직으로 전환, 8종 이상의 ‘각서’, 최저임금 이하로 임금을 깎을 수 있는 위법한 서류들을 내밀었다. 1인 시위가 다시 시작되었다. 어느 날은 사장이 그에게 화분을 집어던졌다. 또 어느 날은 얼굴을 때리고 욕설을 퍼부었다. 2022년 11월 방영환이 받은 월급은 26만5000원. 운 좋으면 100만 몇 천원이 월급으로 들어왔다. 그는 주 6일 40시간 일했지만 사측은 하루 3시간30분만 노동시간으로 인정했다.

방영환은 또다시 기나긴 싸움을 이어갔다. 하지만 노동위원회는 사측의 손을 들어주었고 법원은 손해배상 청구를 기각했으며 사측은 그를 업무방해로 고소했다. 결국 2023년 9월26일, 1인 시위를 하던 중 방영환은 분신으로 죽음에 이르렀다.

분신 후 꾸려진 시민대책위원회는 방영환의 죽음을 일터 괴롭힘에 의한 자살로 보고 산업재해로 인정받기 위한 절차를 진행했다. 동시에 방영환을 ‘열사’로 호명했다. “1980년대 열사를 중심으로 한 영웅화와 애도의 정치가 더 이상 작동하지 않는 시대”(김원)에 열사의 호명은 낯설 뿐만 아니라 낡아 보인다. 그러나 열사보다 산재 피해자라는 명명이 더 익숙한 시대에 ‘열사’ 호명은 방영환의 죽음을 둘러싼 법적 인정과 사회적 책임의 간극과 긴장을 불러일으킨다. 산재 제도는 방영환의 죽음을 우리 사회의 공인된 피해로 만들어줄지 모르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산업 발전의 부수적 피해라는 차원에서 이뤄지는 불충분한 인정에 불과하다. 그럼에도 그의 죽음에 대해 우리가 윤리적이고 정치적인 책임을 느낀다면, 노동자가 자살에 이르기까지 겪는 구조적 폭력의 실체를 드러내는 것부터 출발해야 한다.

227일로 멈춘 방영환의 1인 시위를 지금까지 이어가고 있는 방영환의 동료들에게 ‘열사’ 호명은 영웅화와는 아무 관련이 없다. 그러나 권력의 정점에 있는 이들조차 스스로를 피해자라고 내세우는 시대에 부당한 권력에 저항한 인간, 방영환을 ‘열사’로 부르는 대신 다른 무엇으로 명명할 수 있을까. 그는 유서에 “난 살고 싶다”는 생의 의지를 남겼다. 죽음을 결심한 순간까지 삶을 포기할 수 없었던 그에게 열사라는 호명은 존엄함을 잃지 않으려 했던 노동자 방영환의 죽음에 대한, 그의 결정에 대한 존중이기도 하다.

전주희 서교인문사회연구실 연구원

전주희 서교인문사회연구실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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