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 없는 독립군을 기억하자

2024.02.26 19:49 입력 2024.02.26 20:01 수정

[신주백의 사연史淵]이름 없는 독립군을 기억하자

민생단사건과 국민혁명
그리고 자유시참변은
한국독립운동사에서
한순간 최대의 독립군이
희생된 아픈 역사다
희생자 중 가장 많은 수가
민초였을 것이다

3·1절을 맞아 생각해본다
지금 독립운동 관련 시설
어디에도 없지만
모든 무명 독립운동가를
기억하는 기념물이
독립기념관부터 시작해
각지에 설치됐으면 한다

어느덧 30년이 넘었다. 박사논문 준비차 1993년 연변대학에 반년 정도 유학을 다녀온 지. 정식 절차를 밟아 그곳에 가기 위해 서울 수유리 교육장에서 4시간 동안 반공 정신교육을 수강하기도 했다. 그때는 그랬다. 중국을 포함해 8개 국가를 방문하려는 한국인이라면 그래야 나갈 수 있었다. 몇달 전인 1992년 8월에 한국이 중국과 수교했는데도 말이다.

■ 민생단사건, 가해자도 희생자도 조선인

약간 부담스러운 미지의 세계를 방문하는 데 따른 불안감을 가진 채 연변대학에 가서 가장 먼저 집중한 주제가 1932년 2월 결성된 민생단을 둘러싼 갈등이었다. 귀국하자마자 수집한 자료를 가지고 논점을 정리해 논문으로 발표했다. 이 문제를 분명히 정리해야 1930년대 만주지역 항일무장투쟁 전체를 바라보는 나만의 시선을 제출할 수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때까지만 해도 한국의 연구는 반공, 파벌투쟁 그리고 중국인의 한국인 공격이라는 민족감정을 중첩해 이 사건을 다루었다. 북한에서도 종파주의자들이 좌경주의를 추종하며 벌인 갈등인데, 김일성이 해결해가며 주체를 세웠다고 보았다. 전자는 중공당에 종속된 모습을 강조하며 반민족과 반공을 드러냈다면, 후자는 김일성의 부상 과정을 설명하는 소재로만 취급했다.

사실을 바라보는 현격한 인식 차이에서 드러난 거리감은 당시에도 마찬가지였다. 민생단 주도자들은 일본군의 만주 침략에 힘을 얻어 북간도, 그러니까 나의 언어로 하면 동만주지역 조선인 사회의 안정과 자치를 주장했다. 하지만 비판하는 사람들은 민생단이 친일반공단체라며 저항했다. 이에 일본조차 민생단 문제가 치안 불안 요인이라 치부할 정도여서 민생단 주도자들은 창립 5개월 만인 7월에 사무실을 폐쇄하고 10월에 해체를 선언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이때부터 민생단 유령이 중국공산당 동만특별위원회에 떠돌아다녔다. 있지도 않은 민생단에서 유격근거지에 스파이를 보냈다며 색출하는 활동이 1936년 4월경까지 계속되었다. 스파이 색출에 열심인 사람은 조선인이었다. 그들은 민생단을 반대하는 투쟁이 곧 파쟁을 반대하고 친일주구를 반대하며 부농(富農)까지 반대하는 계급투쟁이라고 간주했다. 조선인 희생자도 가해자의 논리를 내면화하며 동의했다. 이념에 목맨 좌경주의가 사실을 제대로 보지 못하게 한 것이다. 결국 내부에서조차 그렇게 많은 혐의자를 심문했는데 일치하는 자백이 하나도 없다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 사실이 아니기 때문이다.

결과는 참담했다. 연변조선족자치주에서 혐의자라 지목된 사람을 1980년대에 조사해보니 민생단원이 한 명도 없었다. 그때 조사한 인원이 자그마치 560여명이었다. 1931년 4월 중국공산당의 공식 통계에 따르면, 만주지역 당원 1190명 중 약 54%인 636명이 동만특별위원회 소속이었다. 단순히 추론해도 무장투쟁 와중에 엉뚱한 내부투쟁으로 얼마나 많은 사람이 희생되었는지 쉽게 알 수 있다. 역사는 이를 ‘민생단사건’이라 말한다.

희생자도 가해자도 안팎으로 어려움을 겪으며 무장투쟁을 지속한 이유는 일본 제국주의가 싫어서였다. 독립을 위해서였다. 만주 땅, 곧 중국에 사는 이상 이곳에서 반일독립전쟁을 벌이고, 이를 발판으로 국내로 진격하여 독립을 이룬다는 전략에 동의한 선택이었다. 그런데도 우리는 존재조차 모르다 이제야 ‘사건’으로만 이것을 기억하기 시작했다. 한쪽으로는 중국공산당의 영향 아래 활동했다는 이유로 여전히 홀시한 채.

■ 기록에도 없는 독립군들

중국 정세와 조선 독립 사이에 전략 차원의 관계를 인지하며 목숨까지 내놓은 경험은 이미 1920년대 중반에도 있었다. 그것도 만주가 아니라 남쪽 끝자락에 있는 홍콩 인근의 광저우에서부터였다. 나는 이런 독립운동가들의 존재를 대학생 때인 1984년 처음 알았다. 본명이 장지락인 김산의 회고록 <아리랑>(동녘)이 출판되면서였다.

처음 들어본 독립운동가였지만, 김산의 회고록은 강렬한 충격이었다. 독립운동을 하기 위해 신흥무관학교에 스스로 입교한 사람이 나중에 사회주의자가 되고, 다시 중국국민당의 장제스가 주도하는 국민혁명군에 참가하여 생명의 위험을 감수한 선택이 놀라웠다. 그의 회고에 따르면 사회주의 이념에 동조하는 사람 800여명 외에도 만주의 독립군 400여명, 시베리아내전 때 유격대에 참가했던 사람 100명 이상, 식민지 조선에서 100여명이 광저우로 모여들었다. 심지어 모스크바에서 직접 훈련받은 마르크스주의 학생 30명도 합류했다.

1500명의 조선인 독립운동가가 광저우에 모인 이유는 명백했다. 중국국민당이 주도하는 국민혁명, 곧 북벌에 참여하기 위해서였다. 그들은 국민혁명군의 일원으로 ‘조국 해방의 첫걸음’인 광저우에서부터 베이징으로, 그리고 다시 만주로 향하는 모습을 상상하며 전투에 뛰어들었다. 그들은 가슴에 ‘화북으로! 그리고 한국으로!’라는 구호를 담고 있었다. 김산도 국민혁명군이 승승장구할 때 가슴이 미칠 듯이 기뻐 날뛰었다며, 만나는 중국인에게 ‘2000만 한국인이 국내에서, 그리고 만주에서 기다리고 있다’고 말했다 한다.

하지만 여기까지였다. 제1차 국공합작이 깨지고 서로를 죽이는 격렬한 충돌이 있었다. 그 와중에 조선인 참가자도 각자의 길을 선택하고 뿔뿔이 흩어졌다. 1928년 6월에는 베이징에 입성한 장제스가 북벌을 중지했다. 만주 진격을 기대하며 국민혁명군에 참가했던 독립운동가들은 좌절할 수밖에 없었다. 그들을 기다리며 무장투쟁을 준비하던 만주의 독립운동 세력도 허망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희생을 선택한 조선인은 역사의 기록에서조차 흔적 없이 사라졌다.

오늘날 한국, 중국, 대만 어디에서도 희생한 조선인들을 기억하지 않는다. 한국에선 남의 나라 혁명이란 시선도 강하다. 중국과 대만에 그들은 모래사장의 바늘처럼 미미한 존재에 불과하다. 국가 단위에 갇혀 제한된 시야를 넘어서지 못하는 우리의 메마른 역사 감수성을 여실히 보여주는 대목이다.

■ 외면당한 독립군들

독립운동가들이 조선 독립을 위해 한때 중국보다 더 기대했던 곳이 시베리아였다. 1918년 시베리아내전 초창기까지만 해도 조선인은 적군(赤軍), 백군 양쪽에 다 있었다. 하지만 일본군이 백군을 밀어주면서 명확해졌다. 독립을 바라는 조선인은 적군 편에 설 수밖에 없었다. 그것이 항일투쟁의 일부분이었기 때문이다. 이들의 활동에 새로운 전환점을 제공한 움직임이 만주 독립군의 월경이었다.

만주의 독립군은 1920년 두 차례 독립전쟁을 치르다 일본군의 대규모 공세에 밀려 시베리아로 건너갔다. 물론 그냥 건너지 않았다. 시베리아의 조선인 무장대와 스보보드니(자유시)에 모여 새로운 독립전쟁을 준비하고자 했다. 이들은 그러기 위해 조직을 통일할 필요가 있었다. 적군으로부터 군수품을 보급받고 다시 무장할 수 있기를 기대했다. 하지만 기대와 달리 시베리아내전에 참가한 조선인 무장 세력 사이에 주도권 다툼이 일어났다. 그때 일어난 갈등으로 참극이 발생했다. 무장해제를 주도한 측은 한 명만 사망했는데, 거부하던 측은 36명 사망에 60여명이 행방불명됐다.

한국 사회는 이때 사망하거나 행방불명된 사람이 누구인지 알려고 하지 않는다. 그들 한 사람 한 사람을 기억하려고 노력하기보다 이념의 잣대로 재단하는 데 바쁘다. 러시아 볼셰비키와 사회주의자가 독립군을 공격했다며 ‘좌파’ 공격의 좋은 소재로 즐거이 취급할 뿐이다. 작년에도 그랬다. 하지만 독립군이 결집한 이유를 설명하는 과정에서 그렇게 단정할 수 없다는 학계의 연구가 뒷받침되기 시작했다(반병률, <홍범도장군>). 그러다 보니 사람보다 이념을 앞세우며 기획한 홍범도 흉상 철거는 애초 계획대로 진행되지 못하고 있다. 이제는 한국 사회가 역사인식의 기본선을 지키는 성숙 단계로 진입한 것일까.

민생단사건, 국민혁명, 자유시참변은 한국 독립운동사에서 한순간 많은 독립군이 희생된 아픈 역사이다. 희생자 가운데 가장 많은 수가 흔한 말로 ‘민초’였을 것이다. 유복한 집안 출신이거나 지식인이 아니라 처절한 삶의 조건 속에서 몸으로 독립의 필요를 절감한 사람들이 대부분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3·1절을 맞이하며 생각해본다. 지금은 독립운동 관련 시설 어디에도 없지만, 모든 무명의 독립운동가를 기억하는 기념물이 천안 독립기념관부터 시작해 각지에 설치되었으면 한다고. 그렇다고 국립서울현충원처럼 홍범도의 대한독립군으로 잠시 착각하게 만드는 ‘대한독립군 무명용사 위령탑’ 같은 이름을 붙이진 말았으면 한다.

신주백 역사학자·전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장

신주백 역사학자·전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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