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공화, 대동세상의 현재이자 미래

[신주백의 사연史淵] 민주공화, 대동세상의 현재이자 미래

임시정부 건국강령은
특권을 철폐하고
차별을 방지하며
균등을 국가가 주도하는
‘전민적 데모크라시’ 구상

해방 후 분단체제로
그 이상은 사라진 상태지만
희망의 끈은 아직 남아
광주 5월항쟁과 촛불 때
대동세상을 직접 경험했다

공공성 강화하는 방향서
이것을 밖으로
끄집어낼 수 있는 자
민주공화를 구현하려는
사람들이다

대동세상, 대동사회는 한국 사회에서 미래의 이상향을 말할 때 사용하는 용어의 하나다. 한자사전에서 대동(大同)을 찾아보면, 약간 차이가 있을지라도 대체로 같다는 뜻과 다른 세력끼리 하나 된다는 의미가 있다. 또 세상이 번영하여 화평(和平)하게 된 이상향이라는 뜻도 있다. 결국 약간의 차이를 넘어 서로 협동하며 번영함으로써 평정한 상태를 대동사회, 대동세상이라 말할 수 있겠다.

■ 대동의 사회화

대동이란 말은 17세기 대동법의 실시 과정에서 확산했다. 대동법은 공물(貢物), 곧 특산물을 쌀로 납부하게 한 납세제도이다. 이 제도는 공물을 부과하는 단위를 호(戶)에서 토지로 바꾸었으므로 토지 소유층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양반층의 이익을 건드린 혁신성이 강한 조세제도였다. 일부 지배층의 강한 반발은 당연한 현상이었다. 하지만 백성들은 새 제도가 “넓고 큰 은혜를 입어 병들고 지친 자가 모두 일어나 춤추며 소생하기를 기대”하는 납세제도라며 지지했고, ‘백성이 좋아하는 법’이 곧 대동이라 옹호하는 사람도 있었다(<광해군일기> 광해군 1년 4월27일, 태백산본 26책). 그래서 백성들은 선혜(宣惠)라 부르는 중앙정부와 달리 제도의 실시 자체를 대동으로 간주하고 대동법이라 불렀다. 그러자 몇몇 지방 관아도 바꾸어 불렀고, 마침내 중앙정부도 대동법을 공식 법명으로 삼았다

대동법의 전국 실시는 한 세기나 걸렸다. 그사이 공물로 거둔 쌀을 대동미(米)라 불렀고 대동전(錢), 대동고(庫), 대동전세(田稅)란 말도 생겼다. ‘대동’은 사람들 사이에 일상의 필요에 따라 수용되고 활용되며 현재적이고 실용적인 생활 언어로 확산해 갔던 것이다. 그러는 사이 모두가 공유한 대동은 다양한 사회 이념으로 작동하였다. 가령 동학농민군이 1894년에 제시한 요구사항 가운데 결미(結米), 곧 조세로 바치는 쌀은 ‘예전 대동법의 관례에 따라 복구하라’고 주장한 데서 알 수 있듯이, 공적인 판단의 기준점이기도 했다. 또 대동한 여론 그 자체는 공론(公論)으로 인정받으며 정당한 권위를 지닌다고 간주되었다. 그래서 대동은 공동의 여론으로서 단합 및 안정, 화평이란 맥락과 연결되며 사용되었다. 이때의 대동은 왕과 관료층 사이에서 주로 유통된 언어였다. 반면에 대동한 여론이 비판자들 주장에 당위성을 부여하기도 했다. 그들에게 대동은 나라에서 금지하더라도 공론을 형성해 자신의 주장대로 밀어붙일 수 있는 언어였다. 동학농민군이 봉기한 이유와 집강소의 설치가 그러한 경우였다.

집강소는 전주화약 이후 전라도 일대에 설치된 협의체 자치기구였다. 관을 무조건 부정하거나 배제하는 기구는 아니었다. 집강소는 봉건적 도덕 규범의 핵심 제도인 신분제를 철폐하고, 탐관오리를 축출하며 세금을 가혹하게 부과하고 재산을 불법으로 몰수하는 행위를 반대하였다. 소농민의 자립을 보장하는 농민적 토지 소유를 실현하고자 하였다. 동학농민군은 집강소를 통해 농민의 입장에서 공명하게 개혁된 지방정치를 구현하는 향촌질서를 만들어 사회경제적 평등주의를 지향했다. 이후 갑오개혁 때 신분제는 폐지되었다. 그래서 박은식은 동학농민군이야말로 엄격하고 잔인했던 신분 관념을 무너뜨린 ‘개혁의 선구’로 보았다(<한국통사(痛史)>).

그렇다고 동학농민군이 고종, 곧 군주를 부정한 것은 아니었다. 평등을 지향하면서도 근왕(勤王)을 추구함으로써 군주가 정치의 주체인 사회를 꿈꾸었다. 동학농민군은 ‘유교적 민본주의’를 집행하는 부패한 특권적 집권양반층을 대신하여 고종을 중심으로 평등을 지향하는 ‘대동 민본주의’를 직접 실현해보려 했다.

■ 대동과 민주, 공화의 만남

동학농민군이 집강소를 설치한 때는 개항한 조선에 자본주의 세계질서가 문명화라는 이름으로 물밀듯 밀려오던 때였다. 그 밀물 속에 ‘공화(共和)’라는 말도 섞여 있었다. 물론 조선에서도 지배층이 정체(政體)나 제도의 맥락을 설명할 때 안정, 화평, 화합의 의미에서 ‘공화’를 드물게 사용했다.

개항 이후 번역어로서 공화라는 말은 세계의 정치체제를 소개할 때 등장하였다. 가령 유길준은 다섯 개의 정체 가운데 하나로 ‘국인(國人)의 공화하는 정체’, 곧 ‘합중(合衆)정체’를 들었다(<서유견문>). 합중정체는 미국의 정치체제를 의미했다. 그래서 개항 직후인 1883년 한성순보는 창간호에서 미국의 정치를 ‘합중공화’라 하였다. 이즈음부터 사람들 사이에 공화는 곧 민주국 미국의 정체를 가리켰다.

당시 소개된 글에 따르면, 미국은 전 국민이 합동으로 협의하여 정치를 하고 세습 군주를 세우지 않으며 관민의 기강이 엄하지 않았다. 전 국민 공동으로 선출한 4년 임기의 대통령이 여러 정무를 총괄하였다. 대통령은 국민이 선거로 뽑은 상·하원 의원과 함께 국정을 논의하고 법제를 결정하였다. 의회와 정부는 잘못이 있을 때 서로를 견제하였다. 당시 사람들에게 미국은 ‘대동한 여론’, 곧 공론이 정치체제에 어떻게 반영되고 운영되는가를 확실히 보여주는 존재였다.

그렇다고 누구도 군주를 공개적으로 부정하지 않았다. 국민이 국가의 주인이라고 말하는 사람조차 1910년 8월까지 그랬다. 민주, 민주주의라는 말은 거의 유통되지 않았다. 민주공화라는 말도 유통되지 않았다. 확인할 수 있는 예외적인 경우라면, 한국병합 1개월 전인 7월23일자 대한매일신보에 ‘민주공화’를 소개한 글이다. 여기에서 민주공화란 “인민이 그 나라의 군주를 공천하여 세우며 법률과 재정과 무릇 큰 정령을 인민이 일체 의정하여 시행하는 나라”였다. 주권인민론에 입각해 정치를 펼치는 나라를 ‘민주’공화라 한 것이다.

민주와 공화의 본격적인 결합 내지는 대동과 공화의 본격적인 삼투는 1910년 주권을 상실한 이후부터였다. 첫 깃발은 1911년 미국 리버사이드에서 열린 제3차 대한인국민회 북미총회 때 제시된 무형의 임시정부론이었다. 이어 1917년 주권이 민(民)에게 있는 ‘신한(新韓)’을 세우겠다는 ‘대동단결선언’이 나왔다. 결국 주권국민론을 중심으로 민주, 공화, 대동의 결합이 이루어진 결과물이 1919년 4월 상하이 임시정부의 ‘임시헌장’이다.

임시정부가 제1조에서 밝힌 민주공화제는 남녀, 귀천, 빈부에 관계없이 인민 모두가 사회경제적으로 평등하고, 선거권과 피선거권을 가져 정치적으로 평등한 국가였다. 또 민족, 국가, 인류가 평등한 관계를 유지하는 국가였다. 임시헌장 제정에도 관여한 조소앙은 이래야 우리의 독립과 건국이 인류를 포용하고 ‘대동평화를 선전’하며 ‘평균 천하의 공도(公道)’를 진행할 수 있다고 보았다.

그런데 이때의 평등은 마르크스-레닌주의에서 말하는 사회적 소유만을 인정하고 사적 소유를 부정하는 뜻이 아니었다. 1941년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발표한 ‘건국강령’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다. 임시정부가 전국의 토지와 대(大)생산기관을 국유화하여 국가에서 경제정책을 주도하려는 구상이었다. 요즈음 잣대로 보아도 매우 진보 강령이지만, 농민에게 토지의 경작권을 고루 분배하며, 중소자본이 기업을 경영할 수 있게 한다는 구상이므로 사적 소유를 부정했다고 볼 수 없다. 또한 무상교육을 시행해 국민의 삶의 질을 높이며, 무제한 보통선거권으로 정치의 균등을 보장하여 대동한 여론을 형성한다는 구상이었다. ‘건국강령’은 한마디로 특권을 철폐하고 차별을 방지하며 소수인의 다수인 수탈을 막아 정치·경제·교육의 실질적 균형, 곧 균등을 국가가 주도하여 도모하겠다는 구상이다. 그래서 임시정부는 자신들이 지향하는 민주주의를 자본주의 데모크라시도 아니고 사회주의 데모크라시도 아닌, 모든 한국 국민을 단위로 한 ‘전민적(全民的) 데모크라시’라고 밝혔다.

그러나 해방 후 적대적 분단체제가 공고화하며 전민적 데모크라시의 이상은 우리의 뇌리에서조차 사라진 상태다. 경제성장을 이룩하고 정치의 민주화 과정에서 민주공화국이라는 말은 헌법에 겨우 복원되었지만, 그것은 여전히 수사적 표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식민을 청산하는 원동력으로 분단을 극복할 여지를 확보하는 데 필요한 독립정신의 진정한 구현은 아직 요원한 것이다.

물론 희망의 끈은 아직 남아 있다. 민주주의를 지키는 현장에서는 여전히 대동세상이라는 꿈이 회자한다. 우리는 그 꿈을 광주의 5월항쟁 기간 중 평화로운 자치를 실현하며 5일간 맛봤다. 대동한 여론의 힘을 선거로 집약한 적도 있고, 얼마 전 ‘촛불’ 때도 직접 경험했다. 대동을 구체화하는 힘은 여전히 우리 내면에 흐르고 있다. 공공성을 강화하는 방향에서 이것을 밖으로 끄집어낼 수 있는 자 또한 민주공화를 구현하려는 사람들이다.

신주백 역사학자·전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장

신주백 역사학자·전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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