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궁, 빵, 눈물

2024.06.16 20:30 입력 2024.06.16 20:33 수정

빵을 ‘굽는다’는 동사를 생각할 때면 카자흐 여인들이 떠오른다. 소설 <일곱 해의 마지막>에는 스탈린에 의해 강제 이송당한 한인들 이야기가 쓰여 있다. 그들은 기차 화물칸에 한 달 넘게 실려가다가 낯선 역에 도착한다. 고향인 연해주에서 생전 와본 적 없는 중앙아시아 허허벌판에 떨궈진 것이다. 기차는 떠나버리고, 지낼 곳도 먹을 것도 없는 광활한 초원에서 그들은 깨달을 수밖에 없다. 세상에 버려졌음을. 죽으라고 여기에 방치됐음을. 아이들과 엄마들과 아빠들과 할머니들, 하루아침에 집도 밥도 미래도 잃은 그들이 낯선 황야에서 울고 있다.

끼니 챙기는 이야기의 위엄

절망적인 그 황야에 워낭 소리가 들려온다. 당나귀를 몰고 한 무리의 사람들이 나타난 것이다. 카자흐 여인들이었다. “그녀들은 동쪽에서 정체불명의 낯선 민족이 화물칸에 실려와 황야에 버려졌다는 소식을 듣고 빵을 굽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빵이 식을세라 모포에 감싸 당나귀에 실은 뒤, 한 번도 만난 일이 없는 그들을 찾아왔다. 한인들이 울면서 그 빵을 먹는 동안, 카자흐 여인들도 울음에 합세했다. 빵과 울음. 새로운 삶이 거기서 시작됐다.” 이 문장 때문에 나는 늘 빵이라는 게 너무 좋고 슬프다.

카자흐 여인들이 얼굴도 국적도 모르는 이들을 위해 빵을 구운 건 그저 생물이 뭔지 알기 때문이었다. 생물은 잠을 자고 밥을 먹어야 하는 존재다. 황야에 내버려두면 죽는다. 현실 속 인간들은 이렇듯 번거로운 한계 속에서 산다. 만화에선 어떨까? 만화 속 캐릭터도 자주 궁지에 몰리지만 지나치게 일상적인 행위에 관해선 건너뛸 자유가 생긴다. 특히 판타지물이라면 먹고사는 이야기보다 훨씬 더 흥미진진한 모험에 분량을 길게 써도 된다. 그런데 삼시 세끼 챙겨 먹는 일에 진심으로 몰두하는 판타지 만화도 있다. 제목은 <던전밥>. 그야말로 던전에서 밥 해 먹는 이야기다.

만화가 시작되자마자 벌어진 사건은 주인공의 동생이 용에게 잡아먹힌 일이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용은 소화가 아주 느리다. 동생이 용의 몸에서 소화되기 전에 구하는 게 주인공 일행의 목표다. 용의 서식지는 던전 가장 깊숙한 곳. 미궁 속으로 내려가고 또 내려가야 한다. 이 모험은 대의를 위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걷고 싸우다 보면 배가 고파진다. 제아무리 날고 기는 마법사, 장수, 엘프라 할지라도 허기 앞에선 힘을 쓸 수가 없다. 그래서 이들은 날마다 걸음을 멈추고 음식을 해 먹는다. 만화적 허용으로 생략되곤 했던 부엌일에 관한 디테일이 만개한다. 온 신경을 미래의 목표에 집중하던 캐릭터들도 밥을 해 먹는 순간 모두 현재에 머문다. 가장 자주 반복되는 감탄사는 “맛있어!”다.

그런데 도대체 무엇을 먹는다는 말인가. 이곳은 지상과 환경이 완전히 다른 미궁이다. 이들은 마물(마법생물)을 먹기로 한다. 마물과 싸울 뿐 아니라 먹기까지 한다니 어딘가 잘못된 것 같지만, 요리해보기 전엔 알 수 없었던 적의 속성을 이해하게 된다. 모든 생물은 어떤 필요에 의해 바로 그 형태를 하고 있다. 마물을 대상으로 한 싸움의 기술과 요리의 기술을 읽어나가다 보면 마치 자연사 박물관을 거니는 느낌이 든다.

죽음과 생기는 나란히 있다

이들이 엽기적 재료로도 훌륭한 맛을 내는 건 마물 요리 전문가 ‘센시’와 함께하기 때문이다. 그는 용과의 결투를 목전에 뒀을 때도 부지런히 빵을 굽는다. 큰일이 있을수록 식사가 중요하니까. 순전히 빵을 만들고 싶다는 이유로 위험한 오크 무리를 따라가기도 한다. 그에겐 고이 간수해온 천연발효종이 있고 오크에겐 밀가루가 있으므로, 으르렁대며 기싸움을 하면서도 반죽을 멈추지 않는다. 저주에 걸려 잠시 석화된 동료의 처지를 안타까워하면서도, 딱딱해진 동료 몸을 장아찌를 만들기 위한 누름돌로 쓰기 일쑤다.

이토록 살림에 몰두하는 센시가 유독 싫어하는 마법이 있다. 소생술이다. 본디 죽은 자는 되살아나지 않는 법이라고 센시는 말한다. 미궁에서는 소생술이 흔한 일이라는 동료의 응수에도 센시는 힘주어 반대한다. 되살아남 자체를 싫어하는 게 아닐 것이다. 되살리고 싶은 절절한 타인이 센시에게도 있다. 그러나 쉬이 살릴 수 있는 세계에서는 죽음의 무게도 자연스레 가벼워진다. 죽음을 극도로 무겁게 여기는 건 그가 생을 귀하게 여기는 방식이다. 마물이 사력을 다해 살듯 자신도 필사적으로 살겠다는 의미다.

더없이 생기 있게 먹고사는 만화가 죽음과 애도에 관한 이야기일 수밖에 없는 건 그래서다. 손가락 몇번 움직이면 30분 뒤 오토바이와 함께 음식이 도착하는 시대에 <던전밥>을 읽는다. 식량자급률이 낮고 농업인을 귀히 여기지 않는 국가에 사는, 거식과 폭식 사이를 오가는 우리에게 <던전밥>은 어떤 감각을 돌려준다. 빵과 울음 위에서 삶이 자꾸 다시 시작된다는 것. 살려는 힘과 살리려는 힘이 우리의 본능이고 역사임을 잊지 않으려 한다.

이슬아 작가

이슬아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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